[한마당-박병권] 즐풍목우
입력 2013-04-05 17:52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은 청년시절 아버지의 소개로 궁예의 부하로 들어가 무려 30년 동안 풍찬노숙하다 뜻을 이뤘다. 후백제의 맹주 견훤과 건곤일척의 일합을 겨뤘던 팔공산 전투에서는 부하를 전멸시키다시피 하고 홀로 살아남았다. 개국공신 신숭겸이 자신의 갑옷을 대신 입고 백제군과 싸우는 동안 그믐달에 몸을 숨기고 전투 현장에서 수십 리를 도망 나와 겨우 숨을 돌렸다. 대구 인근 반야월(半夜月)과 안심(安心)이란 지명의 유래이기도 하다.
변방인 함경도 영흥 출신의 이성계는 일개 지방 무장에 불과했다. 동북면병마사로 있으며 갑옷과 투구를 벗을 틈이 없을 정도로 고단했다. 공을 세워 수도 개경에 올라왔을 때도 별 볼일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와도 같은 수시중 경천흥의 도움으로 중앙정계에서 자리를 잡아 마침내 권력을 오로지했다.
왕건과 이성계처럼 평생을 전장에서 제 몸 돌볼 틈 없이 바쁘게 산 인생을 흔히 즐풍목우(櫛風沐雨)라고 한다.‘머리는 바람에 빗질이 되고 몸은 비에 젖어 씻긴다’는 의미다. 긴 세월 객지를 떠돌고 온갖 고생을 다하고 일에 골몰했다는 뜻이다. 순(舜)임금 시절 우(禹)가 치수 사업을 하며 고생하던 일에서 생긴 고사다.
시대와 상황이 다르고, 박근혜 대통령의 인생이 가시밭길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탄탄대로는 아니었다. 대통령의 딸로 태어났지만 양친을 비극적으로 떠나보냈다. 아쉬울 것 하나 없이 잘난 남자들로 가득 찬 정당에서 무리를 이끌고 싸워 대권을 거머쥐기까지는 곡절이 많았다. 독재자의 딸이라는 시각도 있지만 찬사도 있다.
박 대통령은 뉴스위크와 온라인 뉴스매체 데일리비스트 주최로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4차 세계 여성 연례 정상회의에서 영향력 있는 여성 125명에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선정됐다. 뉴스위크는 박 대통령을 이렇게 소개했다.
여전히 남성중심 사회인 한국에서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다. 새 역사의 주인공은 지난해 12월 선출된 박근혜 대통령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뒤를 이어 경제성장을 다시 이루겠다고 공약했다. 연일 계속되고 있는 터무니없는 북의 협박에 굴하지 않는 의연한 리더십을 기대한다. 즐풍목우와 같았던 천막당사에서의 강기를 잊지 마시길….
박병권 논설위원 bk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