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남도영] 재벌이 법정에 선 이유
입력 2013-04-04 20:23
처음엔 상투적인 시나리오인 줄 알았다. 검찰이 지난 1월 신동빈 정용진 정지선 정유경 유통재벌 2·3세 4명을 국회 국정감사 불출석을 이유로 벌금 400만∼700만원에 약식기소할 때만 해도 그랬다.
검찰이 약식기소 처분을 내리면 법원은 유무죄를 판단하는 대신 벌금액만 조정해 약식 명령을 내리는 게 일반적이다. 재벌 2·3세들은 해외출장을 이유로 국회 국정감사에 불참했고, 검찰은 수백만원의 벌금에 약식기소하고, 법원은 이를 인정하는 시나리오였다. 재벌들에게 400만∼700만원의 벌금은 징벌의 의미가 없다.
‘재벌 법정 드라마’의 반전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서울지법 형사17단독 이완형 판사와 형사18단독 이동식 판사는 재벌 2·3세들을 정식 재판에 회부했다. 법원을 출입하는 기자들도, 약식기소된 당사자들도, 이들의 변호사들도 예상하지 못한 재판 회부였다.
재판부의 공식적인 설명은 “피고인들이 무죄를 주장하고 있어 법정에 불러 이들의 주장을 들어보기 위해 정식 재판에 회부한 것일 뿐이지 다른 뜻은 없다”는 것이었다.
굳이 ‘다른 뜻이 없다’고 한 것은 다른 뜻이 있다는 게 아니었을까. 판사 몇 명에게 이유를 물었다. 공식적인 설명과 조금 다른 비공식적인 해설을 들을 수 있었다. 한 판사는 “두 판사가 고민을 좀 했던 것으로 안다”며 “재벌들에게 벌금 400만∼700만원이라는 게 특별한 경고의 의미가 있겠느냐는 공감대가 형성됐고, 정식 재판에 회부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완형 이동식 두 판사는 ‘국정감사에 불출석한 다음 벌금 몇 백만원만 내고 끝내면 된다는 사고방식은 좀 곤란한 것 아닌가. 직접 법정에 불러 반성의 기회를 가지도록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재벌들 입장에서 재판에 출두하는 것은 곤혹스러운 일이다. 지난달 법정에 출두한 3명 모두 법정에 처음 서봤을 것이다. 이들이 법원에 출두하는 날 서울중앙지법 출입구는 기자들로 만원이었다. 수백명의 사진·카메라 기자들과 취재기자들이 취재경쟁을 벌였고, 재벌 2·3세들은 번쩍이는 카메라 세례와 질문 공세를 받아야 했다.
법정 안 풍경은 더욱 그랬다. 서울중앙지법 형사9단독 성수제 판사는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에게 “국회는 국민을 대표하는 기관인데, 나가서 의견을 말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지 않느냐”고 했고, “다른 사람(약식기소된 다른 재벌 2·3세들)도 다 같이 나가지 않았는데, 서로 연락이 있었느냐”고까지 물었다. 정 회장은 “앞으로 성실히 (국정감사에) 임하도록 하겠다”며 머리를 숙였다.
재판 회부는 파격적인 조치도 아니고, 악의적인 조치는 더더욱 아니었다. 유무죄를 가려보자는 일반적인 절차다. 약식기소된 피고인들이 정식 재판을 청구해 무죄를 주장하는 경우도 많다. 다만 이런 일반적인 절차가 재벌들에게 적용되니 대단한 일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재벌은 일반인과 다른 대우를 받고 있다는 ‘가설’도 이런 호들갑의 원인 중 하나인 듯하다.
1971년생, 73년생 두 판사가 생각해낸 절묘한 재판 회부 방안 덕분에 이런 가설이 조금이나마 흔들린 것은 좋은 일이다. 굳이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거창한 논리를 앞세우지 않더라도 이런 결정들이 늘어나면 그만큼 사회가 건전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더불어 올해 국정감사에 임하는 재벌들의 자세도 지난해와는 다르지 않을까.
남도영 사회부 차장 dy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