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익명까지 밝히라는 청와대의 막힌 언론관

입력 2013-04-04 20:20

청와대가 익명 보도를 자제해 달라고 정식으로 주문한 것은 무지와 오만의 소치라고 볼 수밖에 없다. 기자들이 바보가 아닌 바에야 고급 정보를 전해준 취재원을 곤란하게 할 까닭이 없다는 점에서 청와대의 희망사항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기사실명제가 정착된 지 오래된 터에 어느 기자가 속 시원하게 취재원을 밝히고 싶지 않겠는가.

청와대는 이런 요구에 앞서 과연 이 정부 요직에 있는 사람들이 건전한 언론관을 갖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정당 대표 시절부터 무책임한 기사의 진원지로 익명보도를 거론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번 일에 박 대통령의 생각이 반영됐을 가능성이 많다는 말이다. 사실이 그렇다면 언론의 역할을 대통령에게 상세하게 보고해 인식의 전환을 시도하는 게 순서 아니겠는가.

국민들은 대통령뿐 아니라 나라의 명운을 좌우하는 청와대 참모들의 생각과 행동에 무한한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정례브리핑조차 없다. 필요하면 아무 때나 마이크 잡고 발표하는 식이다. 무엇보다 대변인들이 현안을 꿰뚫고 있지 못해 궁금증을 해소해 주는데 한계가 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발품 팔아 취재한 익명보도를 하지 말라니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인가.

확정되지 않은 사안이 관계자의 입을 통해 보도되는 것이 청와대로서는 부담일 수 있다. 이성을 잃은 북한의 도발위협 속에서 부정확한 기사가 보도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을 잉태한 근본적인 책임은 청와대 당국자에게 있는 만큼 언론에 책임을 떠넘겨서는 안 된다.

정보화된 현대 민주국가에서는 입법 사법 행정뿐 아니라 언론도 막중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정치학계에서는 언론을 제4부(府), 노동조합을 제5부로 부르기도 한다. 지도자급 인사라면 마땅히 언론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아야 한다는 의미다. 청와대는 공식발표만 보도하라고 지시하는 듯한 구시대적 언론관을 하루빨리 버렸으면 한다. 이번 일이 청와대가 세련되고 품위 있는 언론관을 갖는 계기가 되길 진심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