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전쟁] 死線 넘나들며 부상병들 돌본 ‘자유수호의 꽃’
입력 2013-04-04 18:50 수정 2013-04-04 22:08
전쟁은 남자들이 수행해왔다. 하지만 인류가 치러 온 수많은 전쟁에서 여성도 적잖은 역할을 했다. 6·25전쟁에서 여군들은 전장 곳곳을 누비며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싸웠다. 미국 국방부 예하 한국전 60주년위원회는 최근 홈페이지에 미 여군들의 활동상을 게재했다. 당시 미 여군들은 6·25전쟁을 지휘했던 극동군사령부가 있었던 일본 도쿄에서 주로 후방지원업무를 했지만 간호장교들은 한반도에서 전투병들과 함께 생활했다. 전쟁은 단순 행정직에 머물렀던 여군들에게 정보 통신 군수 등으로 활동영역을 넓혀주는 계기가 됐다.
美국방부 한국전 60주년위원회
간호장교 주축, 美여군 활동 소개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육군은 상당수 예비역 여군을 현역으로 전환시켜 여군 규모를 대폭 늘렸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동원 해제되거나 비전투 분야에서 복무하고 있는 남성 군인들을 전투 분야로 전환시켜 한반도 전선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증원된 여군 대부분은 미 극동군사령부에 배속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지휘를 받았다. 당시 한국에 배속된 여군은 속기사 2명과 통역관 4명, 전속부관 1명 등 7명이었다. 일본에 배속된 여군들은 주로 도쿄에서 행정과 정보, 군수, 통신, 기상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근무했다. 군 병원 책임자나 수송부대 선임 부사관에 임명돼 후방지원업무를 지휘하기도 했다 1950년 극동군사령부에서 근무하던 여군은 629명에 불과했지만 1년 만에 2600명으로 늘어났다.
◇전장을 누빈 육군 간호장교들=간호장교들은 대부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한반도에 파병돼 남자 군인들과 함께 전장을 지켰다. 미 육군 간호장교들은 6·25전쟁 발발 시에는 3450명이었지만 1년 만에 5397명으로 늘었다. 이 가운데 540여명이 한반도에 파병됐다. 당시 주한 미 군사고문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있었던 유일한 간호장교 바이올라 B 맥커넬 대위는 전쟁 발발 직후 서울에서 700여명의 미국인을 일본으로 후송시킨 공로로 미 정부로부터 동성훈장을 받기도 했다.
6·25전쟁에 투입된 최초의 미군 부대인 스미스 부대는 50년 7월 1일 한국에 도착했다. 이어 나흘 만인 같은 달 5일 간호장교 57명이 부산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작은 건물에 육군병원을 열었으며 바로 다음 날부터 밀려드는 부상병들을 치료해야 했다. 8일에는 12명이 육군이동병원(MASH)에 배속돼 대전으로 이동했으며 한 달이 안 돼 간호장교들은 100여명으로 늘어났다. 8월 14일 미 본토에서 파병된 간호장교들이 도착했다.
육군 간호장교들은 부산에서 압록강까지 한반도 전역에서 부상자들을 돌봤다. 이들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승기를 잡은 유엔군을 따라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북진했으며 같은 해 11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처절하게 후퇴해야 했던 장병들과 함께 사선(死線)을 넘었다.
특히 이들은 간호장교들이었지만 전투병들과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제1육군 이동외과병원에 소속됐던 13명의 간호장교들은 인천시내 한 민간병원을 군병원으로 전환해 부상병들을 치료했다. 이들은 간호복 대신 전투복과 방탄모, 전투화를 착용하고 생활했으며 다른 병사들처럼 방탄모에 물을 받아 얼굴을 씻기도 했다. 잠은 텐트와 폐건물에서 침낭에서 잤다.
위험한 전투현장에 있었지만 다행히 적의 공격에 사망한 육군 간호장교는 없었다. 미 본토에서 육군 간호장교로 임명돼 한국으로 향하던 주느비에브 스미스 소령이 타고 가던 C-47 수송기가 추락해 사망한 것이 유일하다.
◇후송기와 병원선 담당한 해공군 간호장교들=공군간호대는 주로 사상자 공중후송임무에 투입됐다. 특히 50년 12월 중공군의 전쟁 개입으로 하루에 3900명의 환자를 수송하기도 했다. 공군 제801 의무수송대대는 중공군의 공세로 수많은 미군들이 목숨을 잃은 장진호 전투 때 4700명의 사상자를 후송했다. 6·25전쟁이 진행된 3년간 공군간호대는 총 35만명의 사상자를 수송했다. 전쟁 중 항공기 사고로 2명의 간호장교가 사망했다.
해군 역시 2차 세계대전에 투입됐던 예비역 간호장교들을 현역으로 전환했다. 본토에서 근무하던 간호장교들은 대거 한반도에 투입됐으며 민간인 간호사들도 일부 파견됐다. 이들은 3척의 병원선에 나눠 타고 한반도 해안 곳곳을 다니며 부상병들을 치료했다. 인천상륙작전을 지원하기도 했으며 흥남철수작전 등 주요 전장에서 부상자들을 후송하거나 치료했다. 해안에 병원선을 정박시켜놓고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을 돌봤다.
해병대도 예비역 여군을 대거 현역으로 전환했다. 6·25전쟁이 발발한 뒤 해병대 여군은 2787명에 달했다. 전쟁 전에는 이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정보와 통신 등 각종 병과들이 여군들에게 개방됐다. 한 군사전문가는 “6·25전쟁은 여군들의 영역을 확대시켰으며 여군의 활용도를 재조명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두각을 나타냈던 민간여성들=노동문제전문가이자 홍보회사 대표였던 안나 로젠버그는 50년 미 국방부 인사담당차관보로 발탁됐다. 인사담당차관보는 군인 및 민간인 인력 운용에 대한 국방부의 모든 정책을 조정하는 역할을 했다. 로젠버그는 군과 민간인의 통합 운영을 통해 국방부 인력운영의 질적인 향상을 추진했다. 51년 8월 50여명의 저명한 여성들로 구성된 국방부 여성자문위원회(DACOWITS)를 발족시켜 여성들의 군사 분야 진출 확대에 큰 역할을 했다.
전장에서는 여성종군기자 마거리트 히긴스가 눈부신 활약을 했다. 2차 세계대전 때도 현장에서 취재했던 히긴스는 미8군 월터 워커 장군이 “여기자는 전장에 있을 수 없다”며 추방명령을 내렸지만 이를 거부하고 한국에 남았고 워커 장군의 상관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의 허락을 받고 6·25전쟁을 현장에서 취재할 수 있었다. 2년간 헤럴드 트리뷴 종군기자로 맹활약한 히긴스는 숱한 특종을 보도해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최현수 군사전문기자 hs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