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로 달궈진 최영미 시인의 프라이팬… 남북 위기 속 새 시집 ‘이미 뜨거운 것들’ 눈길
입력 2013-04-04 17:30
개성공단 통행금지 등 남북관계가 초긴장 상태로 돌입한 가운데 386세대 대표 시인 중 한 명인 최영미(52)가 신작 시집 ‘이미 뜨거운 것들’(실천문학사)에서 북한의 3대 세습을 통렬하게 조롱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할아버지도 돼지./ 아버지도 돼지./ 손자도 돼지.// 돼지 3대가 지배하는 이상한 외투의 나라.// 꽃 속에 파묻힌 아버지를 보며/ 꼬마 돼지가 눈물을 흘린다/ 돼지가 울자/ 농장의 모든 동물들이 통곡한다// (중략) 때마침 눈이 내려/ 영구차가 미끄러질까 봐/ 위대한(그의 胃는 정말 거대했다)/ 장군님 가시는 마지막 길에 외투를 벗어 바친다/ 영하의 날씨도 느끼지 못하고/ 슬픔을 연기하는 배우들./ 코미디인지, 비극인지”(‘돼지의 죽음’ 부분)
최영미는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의 장례식과 3대 세습을 희화화한 이 시를 비롯해 풍자의 화살을 남북한 정치인들에게도 날린다. 전직 대통령이 목숨을 끊자 장례식을 마련하고 조문하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도 시로 포착된다. “텔레비전으로 최고 통치자의 슬픔이 생중계되는,/ 지금이 그가 가장 약해보이는 순간,/ 눈가의 주름과 뾰루지가 화면에 잡히고/ 검정 조문복을 입고 분향하는/ 엉덩이에서 총알이 튀어나온다/ (내 뒤에서 까불지마!)”(‘권력의 얼굴’ 부분)
그런가 하면 북한과 남한의 사회상을 울음과 웃음에 비교해 보여주는 시도 있다. “북조선에서는 잘 우는 사람이 출세하고/ 남한에서는 적당한 웃음이 성공의 비결.// 인민 모두가 배우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도자 돼지가 사망한 뒤, 눈물공장이 24시간 가동해/ 야근을 하며 눈물을 생산한 노동자들은 간부로 승격하고/ 슬픔을 충분히 짜내지 못하면 쫓겨나고”(‘닮은 꼴’ 부분)
올해로 등단 20년인 그는 시의 촉수를 자신에게도 들이댄다. “전성기가 지난 속옷들이/ 빨랫줄에 걸려 있다// 꿈이 빠져나간 주머니./ 나란히 접힌 순면 100퍼센트가 슬퍼// 일요일 저녁에 구워먹은 소고기가 적막한 위를 통과하고/ 낡은 나의 자화상을 응시하는 시간”(‘꿈이 빠져나간 주머니’ 부분)
최영미의 강점은 타인의 치부에 대한 풍자뿐만 아니라 자신의 약점도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털어놓는다는 데 있다.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1994)로 50만부라는 경이적인 판매 기록을 세운 영광의 세월을 뒤로 하고 세상과 겨루면서 눈에 보이지 않은 상처를 입었던 최영미는 1987년 서울 명동에서 ‘민주 볼펜’을 외치던 젊은 시절의 자신을 회상하기도 한다.
“볼펜 사세요!/ 한 개의 천 원짜리/ ‘민주’ 볼펜 사세요!/ 명동 한 복판에서/ 나는 외쳤다/ 민주주의보다 볼펜을 더 크게,/ 외쳤다 강철 추위에 발을 구르며/ 모금함을 들고 동상처럼 서서/ 1987년 겨울을 운반하고 있었다”(‘1987년 겨울’ 부분)
민주 볼펜을 팔던 시절에 진실이 단 하나의 향기였다면 이제 그는 하나만이 진실이라고 외치지 않는다. “나쁜 자식./ 위선자./ 벗겨도 살점 하나 묻어나지 않는 껍데기들.// 그들을 싸잡아 욕한 뒤에/ 단풍을 보았다// 울긋불긋 모든/ 그들은 하나의 색이/ 아니었다/ 한꺼번에 물들지도 않았다// 진실은 순색(純色)이 아니다”(‘추상(秋想)’ 전문)
과거의 최영미가 혼자 단단하고 혼자 투명한 시인이었을 때, 하나의 색만이 진실이었다면 지금 그에게 진실은 순색이 아니라 세상의 얼룩을 닮은 단풍 같은 것이다. “내 발이 걸쳤던 신발들이 얼마나 될까?/ 내가 버린 신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왼쪽에 줄을 맞추던 시간들이/ 조금씩 오른쪽으로/ 움직이고// 운동화에서 구두로,/ 바꿔 신으며 중년이 되었다”(‘세월의 신발장’ 전문)
이제 오십을 훌쩍 넘겨 중년이 된 그는 ‘시인의 말’에 이렇게 썼다. “이미 슬픈 사람들, 이미 아픈 사람들, 이미 뜨거운 것들과 말을 섞으려 나는 또 떠나련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