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전쟁] 명예 되찾은 용사… 이제야 편히 눈감는다

입력 2013-04-03 18:04


“국립묘지 안장이 안 된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 아버님의 명예로운 일생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이제야 아버님을 편히 보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6·25 참전용사 고 김영인씨의 아들 영수(50)씨는 3일 이같이 말했다. 이날 국민권익위원회 소속 중앙행정심판위원회는 6·25전쟁 중 중공군에 포로로 붙잡혀 잠시 행방불명됐다는 이유로 국립이천호국원이 김씨의 국립묘지 안장을 거부한 것은 부당하다고 밝혔다.

김씨는 1931년 경기도 광주군 돌마면(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농촌에서 태어났다. 김씨가 19살이던 1950년 6·25전쟁이 터졌고, 그해 12월 김씨는 군에 입대했다.

김씨는 8사단 16연대에 배치돼 이듬해인 1951년 2월 강원도 횡성 안흥전투에 참전했다. 이 전투에서 그는 중공군에 포로로 붙잡혔지만 가까스로 탈출해 남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당시 유엔군사령부는 정확한 조사를 거치지 않고 김씨를 중공군으로 간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했다. 이 과정에서 김씨는 병적기록부에 ‘1950년 12월 26일 행방불명됐다’고 기록됐다.

호국원은 이 사실을 문제삼아 “국립묘지의 영예성을 훼손하는 자로 판단된다”며 지난해 10월 김씨의 국립묘지 안장을 거부했고, 김씨 유족은 그 직후 권익위에 행정심판을 제기했다. 영수씨는 “아버지가 국립묘지에서 동료들을 다시 만나겠다고 생전에 자주 말씀하셨다”면서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후에도 국방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며 1954년 재입대해 4년을 더 복무해 만기 전역하신 분인데 국립묘지 안장이 안 된다니 믿을 수 없었다”고 안타까워했다.

김씨 유족이 승소한 데는 탈북 국군포로 장진환(83)씨의 증언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장씨는 동네 친구이던 김씨와 함께 입대해 안흥전투에서 같이 포로가 됐다. 김씨는 탈출에 성공했지만 장씨는 북한에 남아 신의주 교화소와 아오지 탄광 등에서 수십년간 고초를 겪다 2000년 중국을 통해 탈북했다. 장씨는 영수씨의 요청을 받아들여 기꺼이 증인이 돼 줬다.

영수씨는 “장씨의 증언이 없었더라면 입증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며 “60년 전 잘못된 국가기록을 개인이 바로잡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김씨는 지난해 8월 구강암으로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50여년간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다. 참전용사 경력을 평생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영수씨는 “아버지가 편히 눈을 감으시게 돼 다행”이라며 활짝 웃었다.

정부경 기자 vic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