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도 유채꽃 향기에 취해 걸었을까… 제주관광공사 ‘유배지로 떠나는 힐링여행’

입력 2013-04-03 17:10


아름다운 풍광과 세계자연유산의 섬으로 유명한 제주도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조선시대의 대표적 유배지였다. 추사 김정희를 비롯해 우암 송시열, 면암 최익현 등 제주도로 유배를 온 조선시대의 지식인과 정치인은 200여명. 하지만 이들에게 제주도는 단순한 유배지가 아니었다. 추사는 이곳에서 추사체를 완성하고 면암은 처음으로 한라산을 올라 ‘유한라산기’를 남겼다. 제주관광공사는 새봄을 맞아 ‘제주의 봄으로 당신을 유폐시켜보세요’라는 주제로 힐링여행 캠페인을 전개한다.

◇추사 김정희 유배길=“70평생에 벼루 10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는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를 온 때는 55세 되던 1840년. 34세에 대과에 급제해 출세가도를 달리던 추사는 형조참판 시절 정변에 휘말려 한양에서 가장 먼 제주도 대정현으로 유배됐다.

추사는 8년 3개월 동안 탱자나무 울타리에 갇혀 고통의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유배 생활 중 추사체를 완성하고, 국보 180호로 지정된 세한도를 그리는 등 자신의 예술세계를 완성하는 계기로 삼았다. 유배지 앞에 위치한 제주추사관은 추사의 작품과 탁본 등을 전시한 공간.

‘집념의 길’로 명명된 추사유배길 1코스는 제주추사관에서 송계순 집터와 정난주마리아묘를 거쳐 대정향교에 이르는 8.6㎞. 비록 위리안치의 형벌을 받았지만 추사는 대정향교와 안덕계곡은 물론 한라산까지 다녀올 정도로 행동이 자유로웠다.

‘인연의 길’로 불리는 2코스는 제주추사관에서 제주옹기박물관을 거쳐 서광다원에 이르는 8㎞ 코스로 차(茶)를 사랑한 추사의 삶이 다향처럼 은은하게 풍기는 길이다. 대정향교에서 안덕계곡까지 이어지는 10㎞ 길이의 ‘사색의 길’은 추사유배길 3코스. 산방산을 비롯한 추사유배길에는 노란 유채꽃이 그윽한 향을 날리고 있다.

◇정헌 조정철 유배길=해마다 4월 초순이 되면 제주시내 전농로는 왕벚꽃이 화사하게 핀다. 수십년 묵은 왕벚나무 고목이 뿌리를 내린 구간은 LH제주지역본부에서 약 900m 구간으로 왕복 2차선 도로는 벚꽃터널로 변신한다. 전농로는 제주도에서 벚꽃이 가장 아름답게 피는 곳으로 전농로를 따라 걷다가 만나는 홍랑로는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이다.

비운의 주인공은 조선 정조 시해사건에 연루됐다는 누명을 쓰고 1777년에 제주도로 유배 온 정헌 조정철과 제주처녀 홍윤애(홍랑). 스물다섯에 과거에 합격한 조정철은 청운의 꿈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유배자로서 해서는 안 될 운명적 사랑에 빠진다.

정헌과 홍랑의 사랑이 깊어갈 무렵 김시구라는 인물이 신임 목사로 부임한다. 그는 조정철 일가와 깊은 원한을 가진 집안 출신으로 조정철을 죽일 궁리에 몰두한다. 그리고 유배인의 귀양살이를 돕고 연모의 정을 나눴다는 죄목으로 홍윤애를 고문해서 죽인다. 조정철은 투옥돼 여러 달 문초를 겪은 후 전국의 귀양지를 옮겨 다니다 34년 만에 복직해 제주목사로 부임한다.

금의환향한 조정철은 가장 먼저 전농로 주변에 있던 홍윤애의 무덤을 찾았다. 그리고 ‘묻힌 옥 숨은 향기 문득 몇 년이던가’로 시작되는 비석을 세웠다. 훗날 홍윤애의 비석은 시신과 함께 애월읍 금덕리로 이장되고 전농로는 해마다 봄이 되면 홍윤애의 눈물인양 벚꽃이 흩날린다.

◇면암 최익현 유배길=조선 선비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불리는 면암 최익현은 고종에게 흥선대원군의 퇴진을 강력히 주장하다 제주도에 유배된다. 그리고 1년 3개월 만에 유배에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자마자 한라산을 올랐다.

면암은 1875년 3월에 일행 10여명과 함께 동백꽃이 흐드러지는 제주성 남문을 출발한다. 면암이 2박3일 동안의 여정을 자세하게 기록한 ‘유한라산기’에 의하면 그는 방선문을 거쳐 지금의 관음사 코스로 백록담에 올랐다가 영실 코스를 타고 하산한 것으로 추측된다.

면암이 한라산을 오르던 중에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신선이 사는 곳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의 방선문(訪仙門). 그는 ‘유한라산기’에서 “양쪽 가에 푸른 암벽이 깎아지른 듯이 서 있고 그 가운데에 큰 돌이 문 모양으로 걸쳐 있다”고 묘사했다. 제주도에서 가장 긴 하천인 한천의 상류에 위치한 방선문은 관광객은 물론 제주도민도 잘 찾지 않는 숨은 비경. 방선문에는 면암의 글씨도 새겨져 있다. 면암이 “한참 동안 풍경에 취해 두리번거리며 조금도 돌아갈 뜻이 없었다”고 한 까닭을 알고 싶으면 방선문에 발을 들여놓아 볼 일이다.

서귀포·제주=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