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오종석] ‘돈 쓰고 뺨 맞는’ 정부
입력 2013-04-03 18:50
“남의 돈 빌려서 안 갚는 사람의 채무는 갚아주고 성실하게 저축한 사람이 국가로 인해 입은 피해는 왜 보상하지 않는가.”(부산의 60대 저축은행 피해자)
“서울 강남의 9억원짜리 20평대 아파트는 양도소득세를 면제해주고 강북의 5억원도 안 되는 중대형 아파트는 왜 면제 안 해주나.”(50대 하우스푸어)
박근혜 정부가 야심차게 내놓은 정책에 성실한 국민들이 억울해하고 있다. 박 대통령의 1호 공약인 국민행복기금이 지난달 29일 출범했다. 많은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것인데 국민들 사이에서는 불평만 쏟아지고 있다.
최근 채권추심기관에는 “배 째라”며 돈을 갚지 않겠다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개인워크아웃(채무재조정)을 취급하는 신용회복위에는 항의성 전화가 빗발치고 있다. 암 투병 중인 할아버지와 함께 월세로 살고 있다는 한 기초생활수급자. 그는 “월세와 병원비를 내느라 은행에서 대출을 받은 뒤 이를 성실히 갚느라 죽을힘을 다해 살아왔다”며 “연체하지 않으려고 밥 굶어가면서까지 생활비를 절약한 나 같은 사람은 왜 수혜대상에서 제외되느냐”고 항의했다.
모럴해저드 키우는 행복기금
60대 김모씨는 5년 전 남편 퇴직금 1억원을 저축은행 2∼3곳의 후순위채에 투자했다가 해당 저축은행이 퇴출되면서 대부분을 날렸다. 김씨는 “채무자 빚도 갚아주겠다는 정부가 왜 열심히 살면서 저축을 하고도 피해를 입은 저축은행 피해자는 외면하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장기 연체채무를 최대 50∼70%까지 탕감해주는 국민행복기금이 출범하면서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도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다.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원칙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2월 말 국내 은행의 가계대출 연체율은 한 달 전보다 0.05% 포인트 오른 1.04%로 2006년 10월(1.07%) 이후 6년4개월 만에 최고치를 찍었다. 금융권 전체 서민금융상품의 연체율도 최근 급상승하고 있다.
행복기금이 주로 저소득층 간 형평성에 문제를 유발시키고 있다면 지난 1일 발표된 주택시장 정상화 대책은 서민·중산층 간 형평성에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강남만 혜택 받는 주택대책
서울 신당동에 사는 남모(45)씨는 2009년 분양받은 45평형 아파트를 지난해부터 매도하려고 내놓았지만 아직도 팔리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는 은행에서 3억원을 빌려 매달 120만∼130만원을 이자로 내야 하는 하우스푸어로 분양가인 7억여원보다 훨씬 싼 값에 내놓아도 사겠다는 사람이 없어 고민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대책을 내놓는다고 해 기대를 했다가 오히려 더 낭패를 보게 됐다. 인근 부동산중개업소 관계자는 “그렇잖아도 중대형은 매매가 이뤄지지 않았는데 이번 정부 대책으로 매매가 더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양도세 면제 기준이 ‘9억원·85㎡ 이하’이기 때문이다.
남씨는 “9억원·85㎡ 이하 기준은 서울 강남의 돈 있는 사람들에게나 혜택을 주겠다는 것”이라며 “전용면적만 조금 컸지 집값은 형편없는 강북이나 지방 중대형 아파트 소유자에게는 오히려 집을 더 못 팔게 만드는 대책”이라고 화를 냈다.
전·월세 빈곤층인 렌트푸어 등 집 없는 사람들은 “정부가 집 없는 ‘진짜 서민’은 배려하지 않았다”며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고 있다. 정부 정책은 원칙과 형평성이 기본이다. 그런데 행복기금과 주택대책은 이것이 깨지면서 많은 국민을 승복시키지 못하고 있다. 적자재정을 감수하면서까지 사회적 약자를 돕고 경제를 활성화하겠다는 게 정부의 의도다. 하지만 행복한 사람보다 불행한 사람이 더 많다. 이제라도 정부가 철저히 보완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돈 쓰고 뺨 맞는’ 꼴이 될 것이다.
오종석 경제부장 js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