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운식 (4) 여행업계서 배운 발권업무 선교사 돕는데 큰 자산

입력 2013-04-03 17:36 수정 2013-04-03 21:51


미국무성 해외경제협조처(USOM)의 여행과장 직책은 항공사 입장에서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자리였다. 해외여행이 거의 불가능했던 1960년대 수천명의 미국인과 한국인 직원의 해외여행 항공권을 구매하는 직책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미국 정부가 구입하는 모든 물자를 자국 국적 회사에서만 구입하도록 하는 ‘바이 아메리카(Buy America)’ 정책을 시행 중이어서 여행과장이었던 나는 팬 아메리칸(Pan American) 항공이나 노스웨스트(Northwest) 항공의 항공권만 구입해야 했다. 자연스럽게 쌓게 된 항공사 관계자들과의 인연은 결국 나를 여행업계에 발을 들여놓게 만들었다.

USOM에서 근무하던 어느 날, 노스웨스트 한국 총대리점 샵항공의 백종근 사장이 사무실이 있는 서울 반도호텔의 카페로 나를 불렀다. 백 사장은 “미스터 정, 나와 함께 일해보지 않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외교관의 꿈을 접은 뒤, 세계를 누비며 사업을 펼치는 새로운 꿈을 꾸던 나였기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 자리에서 백 사장의 제안을 ‘감사하다’는 인사로 수락했다.

내게 새로운 기회를 주었던 USOM을 떠나는 일은 감정적으로 쉽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내일을 위해 나는 한 달 동안 그간의 업무를 정리하고 사표를 제출했다. 그리고 3번째 직장인 샵항공에서 여행업계의 첫걸음을 뗐다.

막상 여행업계에 들어와 보니 핵심은 항공업무라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됐다. 이를 위해 나는 샵항공에서 발권업무를 체계적으로 배우는 데 주력했다. 발권업무 교육을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의 KLM본사를 찾았을 정도로 나는 발권업무 습득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때 배운 발권업무는 이후 선교사들과 선교사 가정의 여행을 돕는 데 귀중한 자산으로 활용됐다.

USOM에서 첫 비행기 탑승이라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면, 샵항공에서는 생애 첫 해외여행이라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했다. 1964년 대만 국적기인 CAT(Civil Air Transport)가 새 기종을 한국노선에 투입하면서 우리나라 여행업계 관계자를 초청했다. 첫 해외여행지인 대만까지 나를 태워 준 비행기는 4개의 터보제트 엔진을 단 대형 비행기였다.

첫 비행에서는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난기류에 접어들어 기내가 흔들릴 수 있다”는 기장의 안내방송에 덜컥 겁이 났던 것이다. 사고를 대비해 가입한 보험금을 계산하며 이제 4살, 2살 된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교육을 무사히 마칠 수 있는지, 노모와 아내가 극심한 상처 속에 살게 되지는 않을지 등등의 생각들이 첫 비행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흥분과 기대감, 그리고 극심한 불안이 공존했던 첫 해외여행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왜 그렇게 걱정하고 불안해했는지 웃음만 난다.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는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주시지 않을 것이고, 또 시험이 온다 해도 하나님을 믿으면 다 이겨낼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음이 약했던 당시의 나로서는 쉽게 떠올리지 못했던 것 같다.

60여년 전의 첫 해외여행 이후, 나는 비행거리로만 따지면 지구를 백 바퀴도 넘게 돌았던 것 같다. 여행업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 ‘세계를 누비며 많은 일을 하고 싶다’는 나의 꿈이 이렇게 이루어 질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지금 와서 과거의 수많은 사건을 떠올려보면 하나님은 늘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내 마음의 소원들을 이루어 주셨다.

정리=최승욱 기자 apples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