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김종걸] 창조사회의 기반 사회적경제

입력 2013-04-02 19:33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 청문회에서 창조경제를 둘러싼 날선 질책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창조경제가 지향하는 바는 분명하다. 융합의 기술·산업을 통해 신산업을 만들고 그것을 새로운 일자리로 연결시킨다는 것이다. 정책방향이 특별히 잘못된 것도 아니다. 6대 전략, 41개 국정과제로 나열되어 있는 정책이 구체성을 결여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모호하게 보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정책 논리성의 부족 때문이다. 주력산업의 도출, 중장기 목표, 담당주체, 기술과 인적자원의 육성방안, 정부의 실행체계 등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게 염려할 것도 없다. 정부가 출범한 지 이제 겨우 한 달, 지금부터 채워나가면 된다.

아쉬운 점은 사실 그게 아니다. 창조라는 단어가 경제 분야에만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다. 창조란 복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시민사회와 정부의 융복합에 의한 새로운 창조사회의 건설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기술과 산업의 융복합보다 더 복잡하며 더 다루기 까다롭다. 그래서 더 ‘창조적’이다.

현 정부의 국정 제1목표 ‘창조경제’, 제2목표 ‘맞춤형 복지’는 어딘가 서로 겉돈다. 성장은 창조경제로, 복지는 맞춤형으로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맞춤형 복지의 실현수단이 마땅치 않다. 초점이 사회서비스 전달체계의 합리화에 있다고 한다면 필자가 알고 있는 해결방식은 다음의 두 가지다.

첫째는 각 부처별로 산만하게 분산되어 있는 유사기능을 통합시키는 것이다. 정부부처 간 벽을 허무는 것이며 통합된 예산의 집행체계를 정비해야 한다.

둘째는 사회적 경제로 불리는 영역, 즉 협동조합, 사회적기업, 생활관련 시민단체를 복지전달체계의 한 축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영국 보수당 데이비드 캐머런 정부의 ‘큰 사회(Big Society)’론 주창, 2012년을 세계협동조합의 해로 규정한 유엔의 결의, 프랑스 올랑드 신정부의 ‘사회경제연대부’ 창설 등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우리가 갈 길은 아직 멀다. 사회적기업육성법(2007년) 이후 1조원 가까운 예산이 투입되었으나 자립적 발전은 아직 요원하다. 비영리단체지원법(2000년)에 의해 미국·일본보다 더 많은 우대조치를 강구했지만 시민단체는 여전히 열악하다. 협동조합기본법의 발효 이후 협동조합 설립 붐이 생겨나고 있으나 그 생존력에는 적지 않은 의구심이 든다.

가장 큰 문제는 모두 각기 따로 놀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적기업과 협동조합, 그리고 시민단체의 실질적 협력은 몇몇 사례(원주, 홍성, 완주 등) 이외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종교·재계·노조 등의 사회공헌 활동도 사회적 경제와는 대체로 따로 움직인다. 정부의 각종 사회서비스, 일자리창출예산도 제대로 연계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보자. 2011년 2월 발간된 ‘정부 재정지원 일자리사업 현황자료’에는 총 22개 부처 169개 사업이 수록되어 있다. 적어도 이 중 90여개는 사회적 경제 방식으로 운영될 수 있다. 아직 안 되는 이유는 단지 정책의지가 확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적 경제 관련부처도 사방에 분산되어 있다. 사회적기업은 고용노동부, 마을기업은 행정안전부(현 안전행정부), 자활은 보건복지부, 협동조합은 기획재정부 등과 같이 모두 조각조각 나 있었다.

그렇다고 청와대가 새롭게 조율하는 것 같지도 않다. 지난 정부에서 이 분야의 정책을 담당했던 청와대 서민정책비서관실은 되레 없어졌다. 횡적 정책조율이 가능한 포스트로서 국정기획비서관 혹은 국정과제비서관이 조정할 수도 있겠으나 아직까지 아무런 발표가 없다. 정중동(靜中動) 속에 무엇인가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아주 반가운 일이다.

김종걸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