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운식 (3) 난생 처음 타보는 비행기… 잠까지 설치며 들떠
입력 2013-04-02 17:47 수정 2013-04-02 21:47
1958년 낮시간에 일하던 경찰전문학교가 인천 부평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나는 일을 그만두게 됐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녀야 했기 때문에 부평까지 출퇴근할 수 없었다.
학창시절부터 나는 외교관이 되는 것을 꿈꿨지만 생활비와 학비를 스스로 마련해야 하는 현실은 꿈을 이루기에는 너무나 큰 장애물이었다. 당장 살기 위해서는 직장이 필요했고, 조금이나마 더 나은 삶을 준비하기 위해 학비를 벌어야 했다.
당시 나는 서울의 모 대학 영문과 2년을 마치고 중앙대학교 영문과에 편입해 졸업했다. 대학생 시절 나는 학문에 대한 열정이 강해 주위에는 내가 교육자의 길을 걸을 것으로 예상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미국무성 산하 해외경제협조처(USOM 혹은 USAID)에 취직하게 되면서 나는 서서히 여행업계로 다가가게 됐다. USOM에서 맡은 일이 인사처 내 여행과에서 해외 출장을 담당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USOM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우리나라에 경제 원조를 해주기 위해 만들어진 미국무성 산하기관이다. 내가 근무하던 여행과에는 6∼7명의 직원이 함께 일했는데, 나는 출장명령서 발급과 해외에서 이·취임하는 외국인을 비행장에서 영접하는 일을 했다.
입사 2년차인 1959년에는 태어나 처음으로 군용비행기를 타고 전남 광주로 출장을 가게 됐다. 꿈에 그리던 비행기 탑승에 들떠 전날 밤엔 뜬눈으로 보내기도 했다. 불과 한 시간여의 짧은 비행이었지만 나는 이때 내 인생의 과거와 현재를 한번에 조망하며 미래를 설계했던 것 같다. 이후 나는 여행과에서 우리나라를 오가는 모든 항공사와 거래하며 여행업계 진출의 발판을 닦게 됐다.
USOM에서 얻은 또 다른 기회는 대학원 수업이었다. 바쁜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배움에 대한 갈망을 놓지 않고 있었다. 직장에서도 틈만 나면 외국인 직원들과 영어로 대화를 나누며 영어 실력을 키우고자 노력했다. 이를 눈여겨 본 상사의 추천으로 미농무성 부설 대학원에 다닐 수 있게 됐던 것이다. 학비는 USOM에서 지원받았다. 대학원에서 나는 1년간 작문법을 배울 수 있었다. USOM과 대학원에서 배운 영어 실력은 이후 여행업계에서 일하는 데 매우 큰 자산이 됐다.
USOM 시절 받은 또 하나의 축복은 1959년 아내 김경희를 만난 일이다. 처음 만났을 때 아내는 경기도 화성군의 송산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이렇다할 식당이나 카페가 없었는데, 내가 일하던 USOM에는 커피나 도넛, 초콜릿 등 간식류와 간단한 양식을 판매하는 카페테리아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연애 시절 자연스럽게 이곳에서 데이트를 즐기기도 했다. 직장 덕에 생계뿐 아니라 아내에게 점수도 딸 수 있었다.
아내의 가족은 독실한 감리교 집안이었다. 장모님은 여성 장로였는데,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첫 여성 장로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는 만난 지 1년여 만에 결혼을 해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나의 권고로 교직생활을 정리한 아내는 미장원을 개업해 가계를 도왔다. 아내의 충실한 내조로 우리 가정은 차츰 자리를 잡아갔다.
나는 1960년 결혼한 이후 끊임없이 아내의 전도를 받았지만 바쁜 일상에 교회에 나갈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내가 삶으로 보여 준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기도 덕분에 나는 결혼 4년 만에 서울 이수성결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독실한 기독교 가정의 장녀를 만나게 하지 않으셨다면 나는 신앙의 길을 걷지 못했을 것이다.
정리=최승욱 기자 apples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