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人터뷰] ‘주사파 대부’서 북한인권운동가 변신… 김영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
입력 2013-04-02 17:41
“김정은, 김정일과 달라 체제위기 대처 쉽지 않을 것”
인생의 양극단까지 가 본 사람의 눈빛은 여느 사람의 것과 달랐다. 한때 10만명에 이르렀다는 주체사상(주사)파의 핵심 인물이었다가 180도로 바뀌어 북한인권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영환(50)씨의 눈은 삶을 초월하는 것 같이 보였다. 인터뷰 중간중간 시원스런 웃음을 보이면서도 뭔가 말 못할 사연을 담은 듯한 눈빛은 조금은 차가워 보였다. 북한인권운동으로 중국 공안당국에 잡혀 500군데나 전기고문을 당했지만 시간이 흐른 탓인지 가슴에 큰 원한을 담아놓지는 않은 듯 보였다.
그는 고교시절 성직자를 꿈꿨다고 한다. 그 자신도 “약자에 대한 애정과 불의에 대한 분노, 강한 정의감이 내 힘의 원천”이라고 말할 정도다. 서울법대 82학번인 그는 새누리당 조해진 의원, 원희룡 전 의원, 나경원 전 의원, 서울대 조국 교수, 김난도 교수 등과 같은 쟁쟁한 인사와 대학 동기다. 그러나 정치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정치인이 돼 할 수 있는 일보다 훨씬 값진 일이기 때문이란다. 아니 그것보다는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그들 못지않게 치열했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만난 사람=박병권 논설위원
-중국에 구금됐을 당시 영사접견이 늦어 논란이 많았었는데.
“인권침해를 막는다는 차원에서 좀 더 이른 시일 내 영사접견이 이뤄졌으면 좋았을 텐데 구속된 후 29일째 되던 날 접견이 이뤄졌다. 왜 그렇게 늦었는지 아직도 이해하기 어렵다. 영사접견권이란 것이 형식상 있는 것이 아니라면 자국민 면담에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
-고문 과정에서 김일성 생일 선물로 북송하겠다는 협박도 받았다던데.
“사실이다. 묵비권 행사하니까 다양한 협박을 했다.”
-다양한 활동을 했는데 무슨 운동을 하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지.
“북한 주민들의 인권개선을 위해 북한 민주화 운동을 하고 있는 만큼 북한인권운동가로 불리는 게 싫지 않다. 북한주민의 인권침해를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그들의 인권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관심이 많다.”
중국에서의 고문사건으로 그가 세상에 널리 알려졌지만 사실 1980년대 대학가에서는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강철서신’의 저자로 유명했다. 이후 남한을 혁명화하기 위해 조직한 지하조직인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의 중앙위원회 의장으로도 활약했다. 김영환은 주사파와는 완전히 결별했으며 알려진 것과는 달리 김일성 면담 전에 이미 새 활로를 모색하고 있었다고 했다.
-주체사상을 쉽게 설명하자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김일성이 만든 민족공산주의와 황장엽 선생이 만든 주체철학, 그리고 북한 선전부 사람들이 만든 수령론이다. 수령론은 알맹이가 없이 무조건 충성하라는 것이고, 민족공산주의라는 것도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민족주의를 얹은 것에 불과하다. 핵심이 주체철학인데 김일성은 주체철학에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하고 자기가 만든 민족공산주의만 이야기했다.”
-우리 사회에서 주사파나 종북주의자로 불리는 세력은 무엇에 관심 있나.
“내가 보기에는 종북주의자와 북한은 오로지 민족공산주의에 관심이 집중돼 있다. 북한이나 종북세력은 주체철학에는 관심 없고 민족공산주의와 수령론을 주체사상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황 선생의 주체철학도 ‘자신이 삶의 주체가 돼 살아라’는 도덕률 비슷하다는 비판이 있다.
“그런 점이 분명히 있다. 황 선생과 만나 얘기해 본 결과 느낀 점은 그가 만약 우리나라에서 주체철학을 만들었다면 그렇지 않
았을 텐데, 북한에서 살다보니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비판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이해한다. 북에서 만들다보니 유물론에 대한 비판이 어려워 논리적 전개가 되지 않은 측면이 분명히 있다. 주체철학은 이데올로기로 발전하지 못했다. 이데올로기는 정치철학이 있어야 하는데, 주체철학은 이론적 뼈대만 있고 전략전술도 없는 것이어서 신봉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건 이해가 필요한 것이지 신봉할 만한 것은 아직 없는 것이다.”
-1991년 김일성과의 만남은 어떠했는가.
“방북 전 이미 차우셰스쿠가 처형당하는 등 동유럽의 변화조짐이 있었다. 베를린 장벽도 89년에 이미 무너졌다. 1930년대식의 카리스마적 요소로는 더 이상 통치가 되지 않는다고 느꼈다. 미래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김일성을 만나 미래의 새 패러다임을 위한 영감을 얻고 싶었다. 그의 목소리는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굵은 저음으로 듣기는 좋다. 학생운동권에서는 아마 내가 처음 만났을 것이다. 만나면서 답답했다. 김일성은 주체사상을 모르기도 하고 관심도 없었다.”
김일성은 아무나 만날 수 없다. 우리 측에서 아무리 고위층 인사가 나서 만나고 싶다고 해도 쉽게 만나지지 않는다. 오로지 김일성 본인이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난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김영환은 김일성이 대단히 좋아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남한의 청년이 제 스스로 자신을 찾아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당시 그와 함께 밀입북한 인사는 김일성을 만나지 못했다. 학생운동권에서 주사파가 위세를 떨친 80년대 말∼90년대 초반에는 지하조직망을 통한 밀입북이 성행했다. 북한에 갔다 온 것 자체가 조직 내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분위기였으니 김일성을 만나고 온 김영환의 운동권 내 위치는 가히 아무도 넘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1997년 주사파와 결별하고 최근까지 그들과는 접촉을 끊고 있다.
-요즘 주사파는 어떤 정신세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나.
“만나본 적이 없어 솔직히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한다. 다만 과거 접촉 경험을 살려서 생각해본다면 신념을 흔들리게 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차단한 채 옛 길을 고수하고 있는 게 아닌가 추측한다.”
-일전에 화제가 된 경기동부연합은 주사파와 어떤 관계인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그들이 주사파를 받아들이기 이전부터 그랬다. 주사파가 처음 생긴 1986년 이전부터 그곳은 그런 문화가 있었다. 한국외대 용인 캠퍼스인데 운동권이면서도 규율이 셌고 동료 간 의리와 믿음이 유달랐다. 단결심이 강하고 분위기도 화기애애했다. 임수경 의원 같은 경우는 오히려 자유분방한 스타일이라 선배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민혁당 시절에는 그런 용인캠퍼스의 분위기가 조직의 활력을 줄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그들의 문화를 존중해줬다. 이후에도 그쪽 문화는 별로 바뀌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화제를 북한인권운동과 탈북자 문제로 돌렸다. 중국 조선족과 북한 화교를 이용해 북한을 대상으로 조직활동을 한 혐의로 체포된 만큼 인적네트워크가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지만 예상대로 말을 대단히 아꼈다. 다만 정책문제에서는 거침없었다.
-탈북자 정책을 어떻게 하면 잘 하는 것인지.
“국내에 들어와 있는 탈북자와 해외에 떠도는 탈북자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먼저 국내 탈북자의 경우는 북과 남의 사회 경제 문화 격차가 워낙 커 정착이 어려운 것 같다. 하나원에서 교육을 시킨다고 하지만 기간이 워낙 짧고 해서 쉽지 않은 것 같다. 정부가 탈북자들이 우리 사회에 완전히 정착할 수 있도록 완충적인 역할을 할 어떤 것을 만드는 데 지원을 했으면 한다. 다시 말해 우선 그들이 남한 사람과 접촉하기 전에 탈북자들끼리 서로 정보도 교환하고 일도 할 수 있는 중간자적 기구가 있었으면 한다. 중국 등 해외에 떠도는 탈북자들의 경우 정부가 공식적으로 나서는 것은 한계가 있으니 민간기구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는 방안이 필요할 것으로 본다. 준 정부기구 같은 것을 만들어 그들을 돕는 방법이 있지 않겠나 싶다.”
-북한의 변화 가능성은 어떻게 보나.
“역대 정부가 다양한 가능성을 두고 대북정책을 폈지만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정부 입장은 대화나 교류이지만 북한 내부에 변화가 생겨 체제가 붕괴되는 수밖에 없다. 북이 붕괴된 이후의 구상도 마련해 놓아야 한다. 김정은은 김정일과 달리 제대로 된 체제를 물려받지 못해 위기상황이 오면 대처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김정은은 왕자나 세자로 있다가 왕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 자기 아버지뻘 되는 사람 앞에서 버젓이 담배 피우는 것 보면 알 수 있다.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과 같이 활동한 혁명1세대를 매우 어려워하고 대우해 줬는데 김정은은 젊고 경험이 없다. 그래서 일부러 강한 체하는 것 아니겠는가.”
-한반도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나
“북한 체제는 위기에 봉착했다고 본다. 다만 우리가 체제의 본질적인 우위에 있지만 말도 안 되는 세력에 밀릴 수도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테네와 로마가 왜 멸망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아울러 통일 이후의 상황도 항상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기도 죽전에 집이 있다는 김영환씨는 올해 아들이 고3이라 걱정이 많다고 했다. 서울법대 출신 아버지를 둔 이 땅의 아이들이 겪는 공통 스트레스로 보였다. 주로 전철을 이용해 한 주일에 서너 번 서울에 온다고 한다. 한창 젊은 20대 시절 형성된 자신의 신념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학생운동의 지도자급 자리에 있었던 그로서는 결단을 내리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나이에 비해 노숙한 모습이었다.
bkpark@kmib.co.kr
■김영환은
△경북 안동 출생(50) △서울대 공법학과 82학번 △전민련 조국통일위원회 위원 △범민족대회 추진본부 실무위원 △반제청년동맹 중앙위원 △민혁당 중앙위원회 의장 △시대정신 편집위원 △북한 민주화 네트워크 연구위원 △데일리엔케이 논설위원 △‘강철서신’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