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성기철] 獨對정치 나쁘지 않다
입력 2013-04-01 21:05
박정희 전 대통령은 집권 초기 각계 인사들과의 독대(獨對) 면담을 즐겼다. 대상은 정치인 관료 군인 기업인 언론인 등 직종 불문이었다. 공식 회의나 행사에서 나오기 힘든 솔직한 비판이나 건의를 직접 듣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했다.
언론인 출신인 이만섭(81) 전 국회의장의 회고. “초·재선 의원 시절이던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부름을 자주 받았습니다. ‘임자 나하고 막걸리 한잔 하지. 청와대 지프차 보내줄 테니 당장 들어와’라는 전화가 자주 걸려왔어요. 대통령은 마주 앉은 나에게 시중 여론과 국회 동향 등을 물으며 의견을 달라고 했습니다. 30대 혈기 방장할 때여서 대통령 앞에서 스스럼없이 내 생각을 얘기하곤 했죠. 박 대통령은 그러나 69년 삼선개헌 때 내가 (공화당 의원총회에서) 개헌반대 발언을 한 이후에는 돌아가실 때까지 단 한 번도 부르지 않았습니다. 바른 소리에 귀를 닫은 것이지요.”
대통령 소통 도구로 활용 가능
최고 권력자의 독대 정치. 조선시대 세종 성종 숙종 정조 같은 왕들은 관리들을 단독으로 만나 민성(民聲)을 청취하는 기회를 자주 가졌다. 여론정치를 할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의 대통령들도 그런 방식으로 정치인과 관료, 기업인 등을 만난다. 일종의 소통 도구인 셈이다. 하지만 과거 독대 정치는 폐해가 적지 않았다. 밀실정치, 안방정치의 나쁜 단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장기 독재정권 말기에는 대통령이 정치 아부꾼들의 권력싸움에 휘둘리는 데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민주화 이후 정권에서도 끼리끼리 측근정치의 수단으로 작용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독대 정치의 핵심은 뭐니 뭐니 해도 정보기관장의 단독보고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제외한 모든 대통령들은 국가정보원장과 국군기무사령관으로부터 정례보고를 받았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취재원인 최근 국민일보 보도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이 두 정보기관장의 정례 보고를 폐지할 것이라고 한다. 정보기관의 정치개입 논란을 불식시키고, 대북 및 해외 업무에 주력케 하기 위한 조치라는 것이다. 정보기관에 대한 박 대통령의 불신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선거개입 논란이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보기관장의 대통령 정례보고 폐지가 능사인지는 재고해 볼 일이다. 국정원은 수천명의 직원들이 천문학적인 돈을 써가며 엄청난 양의 국내외 첩보를 수집·분석하는 곳이다. 이런 기관의 성과물을 국정에 적극 활용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60만 병력을 운용하는 군사대국에서 군 정보기관의 활동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것도 상식에 속한다. 권력기관 개혁을 부르짖으며 정보기관을 경시했던 노무현 대통령 집권시절 국가 신인도와 국민 지지도가 매우 낮았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 크다.
정보기관은 대통령이 운용하기 나름이다. 지난 시절 여러 악행은 당시 대통령들이 중심을 잡지 못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정권이나 대통령 개인이 아니라 오로지 국가의 이익을 도모하는데 이용한다는 대원칙만 지킨다면 주례 보고가 아니라 매일 보고를 받아도 된다. 특히 대북 및 해외 정보의 경우 나라의 흥망과 직결돼 있기 때문에 실시간 수시보고를 받는 게 마땅하다.
정보기관 정례보고 바람직
대통령이 정보기관장을 멀리 할 경우 다른 특정 권력기관장에게 힘이 쏠리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에 대한 경계론이 나오는 이유다. 검찰이 지나치게 권력화한 것도 민주화 이후 정보기관을 홀대했기 때문이란 분석이 설득력을 갖는 게 사실이다. 모름지기 권력기관은 견제와 균형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래도 걱정이 된다면 정보기관장 보고 때 청와대 비서실장이나 관련 수석을 배석시키는 것도 방법이겠다.
성기철 편집국 부국장 kcs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