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운식 (2) 누나 잃은 슬픔에 전쟁까지 발발… 피난 행렬에
입력 2013-04-01 17:29 수정 2013-04-01 22:01
해방 후 우리나라는 보이지 않는 38선이 그어져 남과 북이 갈라진 나라가 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과 북이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 시기는 우리 가족에게도 비극의 세월이었다.
해방 직후인 1946년 여름, 나보다 11살 위였던 작은누님은 갓 돌이 지난 아이를 등에 업고 월남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작은매형이 평안북도 선천으로 전근을 가게 돼 그곳에서 신혼살림을 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혼은 오래가지 않았다. 해방 후 어느 날 작은매형은 집을 나간 뒤 돌아오지 못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작은누님은 큰매형의 주선으로 방직공장에 취직해 점차 안정을 찾는 듯했다. 갓난아기는 외가에서 무럭무럭 자랐다. 이때부터 작은누님은 아기의 생활비는 물론 나의 학비까지 꼬박꼬박 보내왔고, 덕분에 나와 어머니는 학비 걱정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작은누님은 공장에서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중학교에 다니는 나를 늘 자랑스럽게 여겼다.
어머니는 혼자 사는 딸이 측은했는지 틈만 나면 재혼을 권했다. 하지만 누님이 택한 길은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하고 남편에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고향은 버틸 만했지만, 누님이 떠난 고향에서는 더 이상 살기 힘들었다. 결국 나는 작은누님의 빈자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고향을 떠나게 됐다.
작은누님을 여읜 슬픔이 채 아물기도 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내가 기억하는 1950년 6월은 매우 무덥고 가뭄이 심했다. 늘 지나며 보던 화성이 폭음과 함께 화염에 휩싸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포성이 온 동네를 뒤흔드는 가운데 남쪽으로 향하는 피난 행렬이 줄을 이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1953년 가을 상경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수소문 끝에 초등학교 6학년 담임이었던 권성하 선생님을 찾아 무작정 성북동으로 갔다. 권 선생님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나에게 격려와 위로를 아끼지 않으셨던 분이다. 돌이켜보면 권 선생님을 만난 것은 나의 유년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큰 축복 가운데 하나였다. 권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권 선생님은 한국전쟁 때 교편을 놓으시고 상경해 한국전력에서 일하고 계셨다. 선생님은 홀로 상경한 나를 흔쾌히 받아주시고, 서울 용문고등학교 야간반에 입학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당시 단칸방에서 네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셨던 선생님이셨기에 선생님의 사랑과 배려가 지금도 눈물겹도록 감사하다.
용문고 시절은 나의 청소년기 가운데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 비록 야간반이었지만 우수한 친구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었고, 반장도 하고 학도호국단 운영위원장 등으로 일하며 리더십도 키울 수 있었다. 특히 글쓰기 훈련과 영어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고교 시절에서 가장 감사한 부분이다. 글쓰기에 대한 관심과 훈련 덕에 나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할 수 있었고, 미국 대외 원조 기관인 USOM에서 장학금을 받아 미국 농무성 부설 대학원에서 1년간 작문법을 배울 수 있었다. 또 지인의 소개로 경찰전문학교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나는 낮시간에 일하던 경찰전문학문학교에서 영문 서류를 정리하고 번역 등을 도우면서 이후 나의 사업에서 큰 자산이 된 영어와 친숙해질 수 있었다.
당시 나는 교회는 다니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권 선생님을 만난 것도, 용문고에 진학한 것도, 경찰전문학교에서 일하게 된 것도 모두 지금의 나를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었던 것 같다.
정리=최승욱 기자 apples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