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만원의 기적] ‘미래’를 받지 못한 아이들
입력 2013-04-01 17:15
깊은 밤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 공항에 내렸다. 탁한 공기, 낡은 차가 뿜어내는 매연과 지저분한 거리는 네팔의 현주소를 짐작하게 했다. 그날 밤은 20년 만에 찾아온 추위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영하 1도, 선교사님은 대부분의 집에 난방이 되지 않아 20여명이 얼어 죽었다고 했다.
‘마하데브베시’에서 ‘돌 깨는 마을’ 아이들을 만났다. 강줄기 근처에서 천막집을 지어 살며 근처에 흩어져 있는 돌을 깨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서너 살 밖에 되지 않은 작은 아이가 자기 팔뚝만한 망치로 돌을 깨는 모습은 매우 위험해 보였다. 이어서 쓰레기더미와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빈민가를 찾았다. 빈민가의 실상은 참혹했다. 30년 전 우리나라에도 난지도가 있었다. 몇 번 찾아가서 섬겼던 적이 있어 빈민가를 보고 놀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들의 삶은 매우 가난하다고 밖에 표현할 다른 단어를 찾기 어려울 만큼 비참했다.
‘기아대책’을 통해 일대일 결연으로 후원하는 아동들이 있는 곳도 방문했다. 많게는 한 마을 당 500∼600명, 적게는 100∼200명이 후원을 받고 있었다. 한국의 후원자들이 매월 보내오는 3만원을 지원받고 있었다. 이 아이들은 먼저 만난 아이들과는 달라 보였다. 어디를 가든지 아이들은 귀엽고 사랑스럽다. 그들의 해맑은 눈동자는 나를 부른다. 그런데 후원을 받는 아이들과 받지 못하는 아이들에게서 그렇게 큰 차이가 날 줄은 몰랐다. 단지 3만원의 차이일 뿐인데.
사진으로 담아온 아이들의 얼굴과 눈빛은 종일토록 저린 내 마음을 더더욱 시리게 만들었다. 후원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의 옷은 허름했고 얼굴엔 생기가 없었다. 그 정도의 차이는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분노가 치밀었던 것은 후원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미래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그저 태어나서 버려진 채 살아가고 있었다. 이르면 12살에 결혼을 한단다. 딱히 할 것이 없어서 결혼을 한다. 그렇게 가난의 악순환은 계속되고 있었다. 힌두교(81%)와 불교(11%)의 영향으로 가난을 업보로, 전생의 죄로 생각하여 덤덤히 받아들인다. 다른 삶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분노를 일생의 가장 큰 죄로 여기기에 정권에 대하여, 신에 대하여, 사람에 대하여, 자신들의 처지에 대하여 어떤 분노도 품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다.
빈민가에서 사탕을 나눠 줄 때 아이들은 내 옷을 붙들고 늘어졌다. 손을 벌리고 달려드는 그들은 내게 사탕을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달라고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이렇게 약속했다. “그래, 다시 오마. 반드시 다시 오마, 나와 내 가정이, 로고스교회와 한국교회가 너의 후원자가 되어 다시 오마. 내 약속한다. 주님의 이름으로.”
일산 로고스교회 안성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