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규정 탓… 고객이 보험사 과징금 대납한 꼴

입력 2013-03-31 18:18 수정 2013-03-31 23:01


보험사들이 거액의 담합 과징금을 소비자에게 떠넘길 수 있었던 것은 허술한 감독규정 때문이다. 이를 수년간 방치해온 감독 당국은 뒤늦게 개선 작업에 착수했지만 3개월이 다 되도록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현행 보험업 감독업무 시행세칙이 주문하는 과징금 처리 방식은 이를 따르면 소비자에게 부담을 전가하게 되고, 따르지 않으면 위법이 되는 이상한 구조다. 생명보험사는 절반 이상이 과징금을 영업비용으로 지출하는 반면 손해보험사는 거의 모든 회사가 보험료와 상관없는 영업외비용으로 처리하고 있다.

국민일보가 31일 전체 보험사에 확인한 결과 무응답 회사를 제외하면 생보사는 전체의 45%, 손보사는 88%가 감독규정과 무관하게 과징금을 영업외비용으로 지출하고 있다. 이런 회사가 보험업계 전체로는 65% 정도다. 이는 감독규정을 따르는 보험사가 전체의 35%에 불과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 대형 보험사 관계자는 “감독규정에는 영업비용으로 하게 돼 있지만 그러면 보험료 산정에 영향을 주는 사업비가 올라 계약자에게 부담이 되기 때문에 영업외 잡손실로 처리한다”고 설명했다. 다른 보험사 관계자는 “과징금이 보통 영업 관련 행위로 부과되는 것이어서 영업비용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소수 의견이 있다”면서도 “과징금은 일시적인 비용이기 때문에 통상적 회계 기준으로는 영업외비용이 맞다”고 말했다.

감독규정에 따라 과징금을 영업비용으로 처리하는 보험사들조차 상당수는 규정의 취지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들의 설명대로라면 소비자들은 잘못된 감독규정 탓에 보험사들의 담합 과징금을 대신 내온 게 된다. 과징금을 영업비용으로 처리하는 보험사 중 삼성생명 등 9곳이 2008년 8월부터 올 3월까지 4년여간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부과받은 과징금은 2528억1300만원이다.

2007년 8월에는 손보사 10곳이 보험상품 가격 담합으로 인한 공정위 과징금을 영업비용으로 처리해 소비자에게 전가했다는 의혹이 나왔다. 당시 금감원은 “확인 결과 손보사들은 공정위 과징금을 사업비(영업비용)가 아닌 전액 영업외비용(영업외 잡손실)으로 회계 처리했다”며 “이 경우 보험료 산정에 직접 영향을 주지 않으므로 계약자 부담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이 설명을 뒤집으면 영업비용으로 처리하는 과징금은 보험료 인상 압박 요인으로 작용해 소비자에게 전가될 수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때도 감독규정에는 영업비용으로 과징금을 처리하게 돼 있었다. 손보사들이 감독규정과 달리 영업외비용으로 과징금을 처리하고 있는데도 금감원은 이를 문제삼기는커녕 영업비용으로 하지 않아 괜찮다고 대신 해명만 해준 꼴이었다.

최근에야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금감원은 과징금을 영업비용으로 처리할 경우 어느 정도 소비자 부담으로 이어지는지, 회사가 부당하게 손실을 회피하는 것은 아닌지 등을 따져 관련 규정을 개정한다는 방침이다. 실무 단계에서는 과징금을 영업외비용으로 처리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파급효과 등을 따져봐야 한다며 쉽게 결론을 못 내리고 있다. 이 결정이 내려져야 감독규정 개정에 들어갈 수 있다.

금감원 관계자는 “과징금 처리 부분은 2005년 보험업 감독업무 시행세칙 개정 때 들어갔는데 그 배경을 찾는 게 쉽지 않다”며 “당시 업무를 담당했던 실무자는 퇴사하는 등 취지를 제대로 설명해줄 사람이 없어 답답하다”고 털어놨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