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운식 (1) “후∼ 불면 날아갈듯 ‘메조 밥’ 아직도 못잊어”

입력 2013-03-31 17:00 수정 2013-03-31 17:02


2002년 9월 27일은 내 생애에서 잊을 수 없는 날 가운데 하나다. 세계관광의 날 ‘관광진흥촉진대회’에서 최고의 영예인 ‘금탑산업훈장’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여행업계에서는 최초였고, 30여년간 여행업에 종사하면서 이 일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198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의 관광산업은 이제 막 유년기를 벗어나 성장기로 접어들던 시기였다. 시장 자체가 작다 보니 한국 여행업계는 전체 산업에서 비중이 작을 수밖에 없었다. 90년대 들어서야 여행자유화와 세계화의 물결 속에 우리 여행산업은 성장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아니셨다면 불모지와 같은 환경 속에서 이만한 성과를 내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 여행 산업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훈장 수여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축복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나는 1935년 30여 가구가 모여 살던 작은 마을(경기도 화성군 고천리)에서 4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밖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해 부모님의 속을 무척이나 태웠다고 한다. 한번은 마을을 벗어나 광교산까지 놀러갔다가 길을 잃어 밤늦게 돌아와 호되게 야단을 맞은 적도 있다. 오봉산 자락 아래 펼쳐진 드넓은 산하에 나의 발끝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을 정도였다. 돌이켜보면 지구촌을 제집처럼 헤매고 돌아다니는 버릇이 이때부터 싹텄던 것 같다.

7살까지 우리 집은 공무원 생활을 하시며 농사도 조금 지으셨던 아버지 덕에 다소 넉넉한 형편이었다. 하지만 7살이 되던 해 아버지께서 인천시 옹진군으로 전근을 가게 되면서 고생을 하게 됐다. 옹진에서의 생활은 강조밥을 먹은 기억밖에 없다. 당시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치르면서 국내의 모든 쌀을 공출해 갔기 때문이다. 메조로 지은 밥은 ‘후∼’하고 불면 다 날아가 버리곤 했다. 1년 후 우리 가족은 다시 화성으로 이사를 왔지만 가세는 점점 기울어져만 갔다. 어머니는 행상을 하시면 집안일을 다 챙기셨고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늘 땔나무를 구해오고 텃밭을 가꾸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초등학교 시절엔 자손이 없었던 큰아버지 댁에 양자로 들어가 큰어머니와 친어머니를 함께 모시게 됐다. 큰어머니는 우리 집안에서 가장 엄한 어른이셨지만, 내게 친자식 이상의 사랑을 베푸셨다. 때론 친어머니보다 더 매섭게 매를 드시기도 했지만,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 항상 내게 더 많은 것을 챙겨주시기도 했다. 아마도 나는 두 어머니의 넘치는 사랑과 관심 덕에 더 밝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식까지 나는 아버지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늘 바쁘셨던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한국전쟁 때 세상을 떠나셨다. 결국 대학은 자력으로 마쳤고 지금의 내가 되기까지 모든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아버지를 원망한 적이 없다. 비록 아버지로부터 돈이나 유산 등 물질적 도움을 받지는 못했지만 도전적인 사업가로서 일생을 살아올 수 있는 정신과 의지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가장 큰 유산이었다.

◇약력 △1935년 경기도 화성 출생 △1957년 용문고등학교 졸업 △1961년 중앙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1971년 서울항공여행사 설립 △1976년 한국항공운송대리점협회 회장 △2002년 제29회 세계관광의날 금탑산업훈장 수상 △2004년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 이사 △현 서울항공여행사 회장

정리=최승욱 기자 apples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