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희망지기-이경림] 늘 배고프고, 늘 외로운 아이들 기도하며 품으세요

입력 2013-03-29 17:37


부스러기사랑나눔회 이경림 대표

“이 시대에 가장 소외된 사람이 누굴까요. 전 (빈곤층) 아이들이라 생각해요. 태어날 때 부모를 선택할 순 없지만 결국 부모에 따라 환경이 결정되잖아요. 소위 ‘부모 잘못 만난 아이’를 남부럽지 않게 잘 돌보는 게 주님의 사랑을 나누는 한 방법이라 생각했지요.”

이경림(49·여) 부스러기사랑나눔회 대표는 21년간 빈곤 어린이를 돌본 원동력을 묻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1991년 빈곤퇴치운동에 동참하기 위해 찾은 서울 시흥2동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아이들’을 만난 그는 가장 소외된 이로 가난한 환경에 놓인 어린이들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86년 ‘빈곤아동의 대모’ 강명순 목사가 설립한 이 단체에서 92년부터 공부방 교사이자 상임활동가로 일한 이 대표는 어린이들이 전국 탁아방과 공부방에서 보내온 가지각색의 사연을 매달 ‘부스러기편지’로 묶어 세상에 소개했다. 27년간 300호 넘게 발행된 이 소책자엔 20만명의 이야기가 담겼다. 천진난만한 글과 그림 속에는 배고픔, 가정폭력, 장애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고단한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아이들 작품이 매년 500여편 모이는데 그 속에 시대와 사회의 아픔이 그대로 반영돼 있어요. 외환위기 때는 ‘IMF, 나 살려’란 글이, 가정·학교폭력이 문제가 되면 ‘때리면 아파요’란 글이 올라와요. 어른과 달리 이 친구들은 아픔을 가리지 않아요. 너무 솔직해서 가슴이 아프기도 하지만 진솔한 글 속에 담긴 희망을 발견할 때면 오히려 은혜를 받기도 해요. 그 때마다 ‘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성경말씀이 실감납니다.”

대한민국에 아직도 이런 곳이 있다니

서울 시흥2동. 91년 당시 도시 빈민이 모여 살던 이곳에서 이 대표는 자신이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게 살아가는 어린이들을 처음 만났다. 공부방을 찾는 이들의 집에는 수도시설이 없었고, 화장실도 재래식을 동네 사람이 함께 쓰고 있었다. 늘 배가 고팠던 꼬마들은 초등학교에 들어갔지만 한글을 읽고 쓸 줄도 몰랐다. 글을 모르는 것은 부모도 마찬가지였다. 육체노동으로 생계를 꾸리기에 급급했던 이들은 자녀들의 공부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자녀 교육은커녕 별 탈 없이 하루를 보내고 저녁을 맞으면 다행일 정도로 부모의 삶은 고달팠다.

“아직도 서울에 이런 곳이 있다니….”

당시 28세이던 이 대표는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어렵지 않은 형편에서 자란 그였기에 충격은 더 컸다. 자신이 나고 자란 서울에 이토록 가난한 이들이 있을 것이라곤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그였다.

이 대표가 공부방 교사로 시흥2동을 찾아간 건 빈민목회를 했던 그의 전 남편 때문이었다. 감리교신학대학교에 다니던 언니의 소개로 만난 전 남편은 소위 ‘운동권 신학생’. 4대째 모태신앙이던 이 대표는 그를 만나며 민중신학에 눈을 떴다. 빈곤퇴치에 관심이 많았던 전 남편은 92년 당시 빈곤 지역이던 시흥2동에 새봄교회를 세웠다. 89년 결혼해 사모가 된 이 대표는 교회 인근에 신접살림을 차리고 공부방을 열어 부모로부터 방치된 동네 꼬마들을 돌보고 가르쳤다.

그가 원래부터 빈곤 아동에 관심이 있던 건 아니었다. 꿈은 패션 디자이너였다. 대학에서 일어교육학을 전공했으나 옷에 더 관심이 많았다. 86년에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국제복장학원에 다니고 신사복 패션쇼 ‘시다(보조)’를 하며 꿈을 키웠지만 1년 만에 모든 것을 접었다. 당시 신학생이던 남편의 학자금을 마련키 위해서였다. 예비 사모가 된 그는 시흥2동에 이사하기 전인 87년 동아제분에 입사해 3년간 일했다.

이 대표는 공부방 교사로 활동하던 91년 지금 단체의 전신인 부스러기선교회를 알았다.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 어린이를 돌보는 선교회의 취지에 공감한 그는 이듬해 이 단체 간사로 아동 빈곤퇴치운동에 발을 들였다. 이 대표는 낮에는 간사로 선교회 본부에서 일했고 퇴근 후에는 한글교실에서 어머니들을 가르쳤다. 또 집에 와서는 어머니들과 함께 인형 눈 붙이기나 마늘 까기 같은 부업을 했다. 돈이 목적이 아니었다. 공부방 친구들의 어머니와 소통하기 위해서였다. 피곤했지만 이들에게 자녀교육법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일하며 친해지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노가다(막일)가 없을 땐 교회에서 술 마시고 화투치며 소일하는 이웃들이 꽤 있었어요. 그땐 교회 수도가 없어 물을 고무 대야에 받아놓고 쓰는데, 이분들이 다 쓰고 가는 일이 종종 있었지요. 그럴 때마다 힘이 쭉 빠지곤 했죠. 물이 귀한 탓에 물 한 대야가 있다는 것으로도 부자가 된 느낌이었거든요. 그래도 행복했습니다. 이런 환경을 경험하면서 가난은 두려운 게 아니라는 것을 배웠고 가난한 아이들이 오히려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거든요.”

아픔은 사랑이 되고

96년 철거될 때까지 재개발지역인 시흥2동에서 살았다. 부스러기공부방과 한글교실 교사로 활동하며 주민들과 동고동락하던 그는 마을이 철거된 뒤 선교회 사무실에서 일했고 전 남편은 농촌 목회를 위해 서울을 떠났다.

주말부부가 돼 각자 사역의 길을 걷게 된 부부는 오래가지 못했다. 전 남편은 ‘좋은 사람이 생겼다’며 이혼을 요구했고 그는 받아들였다. 4년간 떨어져 살았고 다섯 번의 유산으로 아이가 없을 뿐더러 그간 남편의 경제적 지원도 없었기에 부부 간 유대감은 이미 바닥난 상태라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머릿속과 달리 가슴은 무너질 듯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아이를 다섯 번 잃었을 땐 하나님께서 ‘공부방 아이들을 더 품으라’는 뜻으로 이해했어요. 생명에 대한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걸 믿었으니까요. 하지만 이혼은 달랐어요. 2∼3년간 세상이 날 비웃는 것 같아 괴로웠지요. 하지만 그때 알게 된 아이들의 글을 보며 생각을 바꿨어요. 글 속의 아이들 부모님도 저처럼 유산 경험이 있거나 배신당해 이혼한 경우가 적지 않았거든요. 제가 아프니까 이들의 아픔과 시련을 더 공감할 수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절 더 성장케 하기 위해 인생 공부를 시키신다고 생각하니 용서 못할 이유가 없더군요.”

아픔을 겪은 그는 상처 받은 어린이들의 마음을 더 헤아리려 노력했다. 2000년 사무총장이 된 이 대표는 여러 사업을 폈다. 그는 빈곤 어린이 문제는 부모와 가정에 해법이 있다고 보고 위기아동 사례 관리에 관심을 기울였다. 6년간 현장을 경험했던 이 대표는 부모의 학대와 방임이 자녀들의 탈선과 폭력적 성향을 증가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가정이 화목해야 빈곤 어린이 문제도 풀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이 대표는 폭력과 방임에 노출된 위기 어린이들을 지역아동센터에서 돌보는 한편 가정에 사회복지사를 보내 부모에게 올바른 양육 방법을 지도했다. 가정에서 상처받아 오갈 데 없는 성 학대 어린이·청소년을 위해서는 그룹홈 형태의 쉼터를 열어 무엇보다 정서적 안정감을 찾도록 힘을 쏟았다.

또한 그는 빈곤 어린이·청소년을 고등학교까지 마칠 수 있도록 후원자가 1대 1로 지원하는 ‘국내 아동결연사업’에도 주력했다. 그 결과 현재 전국 1535개 지역아동센터와 협력해 6만2000여명의 어린이와 청소년이 부스러기사랑나눔회의 도움을 받고 있다.

기도가 필요해요

21년간 이 대표는 어린이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역아동센터를 수없이 방문했다. 전문적 돌봄을 위해 강남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도 취득했다. 복지정책의 사각지대에서 소외된 빈곤 아동의 삶을 개선키 위해 2008년부터 4년간 국회 빈곤퇴치 연구포럼에 적극 참여했다.

그럼에도 예전에 비해 빈곤 어린이 실태가 나아졌는지에 대해선 의구심이 든다고 했다. 20년 전에 비해 지원 제도가 많이 마련됐고 민간 지원단체도 늘었지만 매달 부스러기편지에 실리는 글과 그림에는 ‘늘 배고프고 늘 외롭다’는 내용이 빠지지 않는다. 최근엔 이혼 등으로 조손·한부모가정이 늘어나면서 가정폭력에 노출된 사례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

“20년 전보다 물적 지원은 늘었지만 상황은 더 나빠졌어요. 그땐 가난해도 가족이 많이 파괴되지 않아 정서적으로 건강했는데 지금 아이를 만나보면 영적으로 황폐해졌음을 느껴요. 사회 전반적으로 빈부격차가 커지면서 상대적 박탈감도 커졌고요.

지난해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어른의 보호 없이 방치된 아동이 97만명에 달하지만 지역아동센터가 돌보는 아이는 10만여명에 그쳤어요. 제도적으로 다소 개선이 됐다고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아동 빈곤율은 점차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더 이상 쌀과 돈으로만 빈곤 아동의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이죠.”

이 대표는 빈곤 어린이와 청소년의 문제는 더 이상 ‘밥’으로 풀 수 없다고 했다. 가족을 중심으로 한 정서적 돌봄이 뒷받침돼야만 풀린다고 단언했다.

그럼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 대표는 무엇보다 기도가 절실하다고 답했다.

“아이들의 필요는 모두 다 달라요. 배고픔이 문제인 친구도 있고, 외로움과 소외감이 해결돼야 하는 친구들도 있죠. 문제는 복합적이나 이들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신앙이고 기도예요. 신앙은 아이들에게 가난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이에요.”

그는 2009년부터 새벽기도를 시작했다. 그 역시 한 어린이를 지원하는 데 있어 그간의 경험이나 학문적 지식, 인적 네트워크만으론 불가능하다는 걸 경험했다.

“저는 모든 사업을 기도로 준비해요. 그러나 아이들에게 직접 ‘기도하라’고 하진 않아요. 종교를 강요하지도 않고요. 다만 이들을 만나는 현장의 사회복지사와 교사에게 신앙교육을 하지요. 사무실에 기도실을 설치해 직원들에게도 기도할 것을 권하고요. 부스러기는 하나님이 만드신 단체고, 아이를 품고 양육하는 일에 그분의 도움 없인 불가능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죠.”

대표가 된 지 올해로 5년째인 그는 매년 목표를 따로 세우지 않는다. 대신 기도로 ‘하나님의 이끄심’을 구한다고 했다. 하나님과 ‘부스러기’ 같은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왔다고 확신한다.

“저는 매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대로 살았어요. 아동 빈곤 사역을 하게 된 것도, 2008년부터 상임대표를 맡은 것도 모두 그분의 뜻이었지요. 다만 바라는 점이 있다면 현장에서 다시 아이를 만나고 싶어요. 2013년인 지금도 돈이 없어 네 형제가 두 개의 겨울 외투를 나눠 입고, 공사장의 공중화장실을 이용하는 아이들이 있다면 믿으시겠어요. 저는 예수께서 가장 낮은 곳에 가장 먼저 오실 거라 믿습니다. 그분의 눈물이 있는 그곳에서 저를 기다리는 아이를 다시 만나는 게 제 꿈입니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