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이흥우] 萬事 또는 亡事

입력 2013-03-29 17:14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군의 압도적 화력에 악전고투하던 마오쩌둥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말을 남겼다. 당시에는 맞는 말인지 몰라도 요즘 같은 평화시대에는 부합하지 않는 명제다. 물리력의 독점이 국가 권력의 가장 큰 특징이나 국가가 이를 적극적으로 행사하면 국민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힌다.

당이 총을 지휘한다는 ‘당지휘창(黨指揮槍)’ 원칙을 고수해 사망할 때까지 군권을 놓지 않은 마오였지만 정권을 장악한 뒤에는 총구가 아닌 인사를 통해 권력을 행사했다. 총구가 권력 쟁취의 수단이 될 수는 있어도 항구적인 권력 행사의 도구는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오의 인사는 성공하지 못했다. 후계자로 지명한 류사오치, 린뱌오, 야오원위안 세 명 모두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마오의 뒤를 이어 국가주석직에 오른 류샤오치는 문화대혁명 때 ‘자본주의 앞잡이’로 몰려 축출됐다. 린뱌오는 마오의 권력을 넘보다 발각돼 러시아로 도망치다 비행기 사고로 숨졌다. 4인방 일원인 야오원위안은 장칭, 왕홍원, 장춘차오와 함께 권력을 사유화하려다 마오 사후 숙청됐다.

류샤오치 숙청은 인사에서 그레셤의 법칙이 작동된 대표적 사례다. 권력욕에 눈먼 린뱌오 일파가 경제정책에 있어 마오와 다른 실용주의 노선을 가려 했던 류사오치를 몰아낸 것이다. 마오의 잇따른 인사 실패는 중국을 암흑에 빠뜨렸다. 그나마 ‘영원한 총리’라는 저우언라이가 있었기에 최악의 파국을 겨우 면할 수 있었다.

충무공 이순신은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했다. 하늘의 보살핌이 있었을까 하마터면 충무공은 수군절도사에 오르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에 대한 이전 인사들이 파행에 파행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1590년 7월 종3품인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에 임명됐다. 하지만 부임하지 못했다. 사간원이 승진이 너무 빠르다고 딴죽을 건 탓이다. 종6품 정읍현감에 임명된 지 8개월 만에 여섯 단계나 승진했으니 사간원의 반대 논리가 전혀 이유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이순신은 이후 한 품계 높은 정3품 만포진 수군첨절제사, 진도군수, 가리포 수군첨절제사에 잇따라 제수됐으나 그때마다 번번이 사간원의 반대로 발령이 취소됐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사간원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발령마저 끝까지 문제 삼았다면 구국의 영웅 충무공의 백전불패 신화는 탄생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무능한 군주 선조가 이 하나만은 잘했다. 인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나라를 위기에서 구할 수도, 나라를 암흑으로 빠뜨리기도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인사문제로 홍역을 앓고 있다. 김용준 총리 후보자부터 한만수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에 이르기까지 고위공직 후보들이 줄줄이 낙마했다. 박 대통령이 ‘나홀로 인사’를 하고, 전관예우 등으로 거액의 부를 축적한 무자격 인사들이 권력까지 탐하다 빚어진 합작품이다. 이로 인해 국가와 국민이 부담해야 하는 기회비용이 너무 크다. 인사를 비공개로 진행하는 가장 큰 이유는 로비와 청탁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인사가 당사자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 경제적 능력까지 좌우하다보니 인사를 공개적으로 했을 경우 그 부작용이 얼마나 심할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렇다고 비공개 인사가 능사는 아니라는 게 박 대통령 인사로 드러났다.

곧 정부 산하단체 인사가 있을 것이다. 해당 분야의 일은 그 분야 사람들이 가장 잘 안다. 한 사람보다 두 사람, 두 사람보다 세 사람의 의견을 듣고 사람을 선택할 때 인사 실패를 줄일 수 있다.

이흥우 문화생활부 선임기자 hw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