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 ‘만가지 슬픔’과 펠르랭 장관
입력 2013-03-29 17:36
책장을 넘기며 이렇게 눈물을 쏟기는 처음이었다. 엘리자베스 김이 쓴 ‘만가지 슬픔’(지니북스, 2008)이 안겨 준 눈물이었다. 그녀가 겪는 불행 앞에서 내 번민과 고통은 사치에 불과하다. 학문이라는 이름의 지적 유희로 삶을 즐기며 가족에 대한 달콤한 사랑을 맛보면서도 내가 처한 사치스런 모순 때문에 괴로워했던 나는 책장을 넘길 때마다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조용한 이주, 입양
책의 첫 장면은 충격과 분노 그 자체였다. 엄마는 미군 병사와의 관계에서 태어난 어린 딸을 대나무 광주리에 숨긴다. 곧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이 들이닥쳤고 딸을 부잣집에 파는 것에 동의하면 지난날의 잘못을 용서해주겠다고 한다. 엄마가 이를 거절하자 그들은 가문을 더럽힌 엄마를 서까래에 목매달아 죽인다. 유교적 가부장제의 모순에 저항했던 한 여인은 이렇듯 남성 우월적인 그릇된 가치관과 민족의 수치라는 병적 분노에 희생양이 된다. 대여섯 살이나 되었을까한 어린 딸은 대나무 틈 사이로 엄마의 죽음을 생생하게 목격한다. 자살로 처리된 엄마의 죽음에 이어 아이는 보육원을 거쳐 미국의 기독교 가정으로, 소위 ‘조용한 이주’로 내몰린다.
입양된 지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가족 성경공부 시간에 아이가 기도할 차례가 됐다. 아이는 하나님을 부르다가 울음을 터트리며 “엄마가 돌아가신 게 너무 슬퍼요”라고 외쳤다. “저도 곧 죽을 것 같아요. 엄마가 살아 계시다면 좋겠어요. 예수님이 다시 엄마를 데려올 수는 없나요” 아버지는 울음을 그치라고 화를 냈지만 아이는 복받쳐 오르는 슬픔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아버지가 사정없이 때리는 뺨을 맞고서야 아이는 가슴으로 울음을 삭일 수 있었다. 어머니가 말문을 열었다. “하나님께서는 보육원의 아이들 중 너를 선택하도록 우리를 인도했다.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의 양부모는 기독교적 신념이 강한 자들이었다. 아버지의 경우, 불경스런 생각을 했다고 딸을 야단치면서도 밤이면 무릎을 꿇고 딸의 영혼을 위해 눈물 흘려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기독교적 경건과 자만심은 백인 우월주의와 결합돼 어린 아이에게는 한없는 상처가 됐다.
저자의 삶은 불행했고 성장해서도 늘 자신은 고통을 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여기며 엄마가 돌아가시던 밤을 꿈꾸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쓸 수 있을 정도로 고통을 승화시켰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나는 너를 평가하고 너는 나를 평가할 뿐…. 그러면서도 우리 모두는 마음속으로 울고 또 운다…. 우리는 조심스레 무관심이라는 가면을 쓰고 서로를 스쳐 지나간다. 당신의 고통이 내 고통을 건드리니 내 마음은 당신의 마음과 같이 아프다.”
엘리자베스 김과 플뢰르 펠르랭의 삶은 낮과 밤처럼 서로 다르다. 펠르랭은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입양됐다. 사회주의적 가치를 지닌 부모 밑에서 사랑과 애정으로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자란 펠르랭은 성공 가도를 달린 인물로 현재 프랑스 중소기업 IT 혁신 장관이다. 며칠 전 나는 그녀가 우리나라를 방문한 것을 접하고서 착잡해졌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면서도 4, 5위의 아이수출국이라는 두 얼굴의 자화상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내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에 살던 시절 만났던 한국인 입양아들은 대개 불행했다. 나는 스트라스부르그의 셍 기욤(Saint Guillaume) 교회의 보에 목사님과 몇 년 동안 친분을 쌓았다. 보에 목사님은 그 지역의 입양아회장으로 80년대에 서울도 방문했고 친아들이 하나 있었음에도 우리나라 여자아이 둘을 입양해 키웠다. 내가 프랑스에 살던 당시 큰 딸은 20세가 넘었고 둘째는 18세쯤이었다. 아이들은 오래 전에 입양됐지만 출생 후 우리나라에서 겪은 정신적 외상 때문인지 목사님 부부의 삶은 한시도 평온할 날이 없아 보였다. 큰 딸은 대학생 때 가출해 칠레 사람과 동거했는데 부모님 집에만 오면 물건을 훔쳐갔다. 40세 남자와 사귀는 둘째는 부모에게 늘 커다란 근심거리였다. 우리는 둘째 딸과 친하게 지내고 싶었으나 내면적으로 완전히 프랑스 사람인 그 아이와 가까워지는 것이 쉽지 않았다. 또 다른 한국인 남매 입양아가 그 도시에 살고 있었는데 둘 모두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그들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과 정신적 고통에 대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나약한 사치, 무관심
아이를 버리도록 만드는 사회문화적 편견과 그렇게 버려진 아이를 외국으로 보내는 국가적 허물에 대해 나 자신부터 반성하게 된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은 부메랑이 되어 결국 나와 공동체에 되돌아온다. 버려진 아이를 돌보는 것은 기독교의 오랜 전통이 아닌가. 수도자이자 감독이었던 에우티미우스는 4세기 후반 보육원을 세운다. 이후 비잔틴 로마제국에서 수도원과 교회는 국가가 책임지지 못하던 아이들을 돌보는 주체였다. 하지만 백만마디 말이라도 한 가지 실천과는 비할 수 없다. ‘만가지 슬픔’에 눈물 흘렸다는 그 말조차도 나약한 사치가 아닐까 싶다.
<한영신학대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