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이태극’ 시조에 쏟은 열정·발자취 회고… 문학평론가 이숭원, 문학사상에 기고
입력 2013-03-28 17:33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시조시인 이태극(1913∼2003)의 아들인 문학평론가 이숭원(58·서울여대 교수)씨가 ‘나의 아버지, 이태극’을 월간 ‘문학사상’ 4월호에 기고해 눈길을 끈다.
“동망산으로 오르는 동대문구 숭인동 언덕의 양철 지붕집에서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였다. 아버지가 마흔셋, 어머니가 마흔넷이었으니 지금 보아도 노산(老産)이다. 위로 누이를 셋 두고 셋째 누이와 9년 차이로 아들을 얻었으니 어머니의 기쁨은 말도 못했을 것이다.”
양철지붕에 비가 새 양동이와 대야를 받쳐놓고 빗물을 받던 일이며, 숭인동 집을 팔고 창신동 이층집으로 이사를 간 일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간다. 아버지가 숭인동 집을 처분한 건 국내 유일의 시조전문지인 ‘시조문학’을 간행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
숭원이 알게 된 건 철이 든 다음의 일이다. 이후 이태극이 충정로 산꼭대기로, 다시 남가좌동으로, 또다시 부암동 언덕으로 이사를 간 것도 ‘시조문학’ 출판비를 충당하기 위해 집 규모를 줄이는 과정이었다.
이숭원은 “아버지가 시조작가협회를 결성해 가람이나 노산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부회장직을 맡으니까 문단 권력을 장악한다는 인
상을 주었을 것”이라며 “그것 때문에 구설에 올라 싫은 소리도 많이 들었던 아버지에게 ‘무엇 때문에 사서 고생하느냐’라고 푸념을 해댄 기억이 못내 가슴 아프다”고 털어놓았다.
“2003년에 접어들면서 아버지의 기억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거의 매일 병원에 갔는데 어느 날은 나를 알아보셨고 어느 날은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마흔셋에 낳아 50년을 함께 산 이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시다니. 개나리 피어나는 병원 뒤뜰에서 나는 숨죽여 울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