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우스꽝스럽고 때론 슬픈 패션의 역사… ‘옷 입은 사람 이야기’
입력 2013-03-28 17:25
옷 입은 사람 이야기/이민정/바다출판사
생애 가장 아름다운 결혼식 날, 신부들은 만국공통으로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는다. 하지만 1900년대 이전의 웨딩드레스는 색이 이렇듯 획일적이지 않았다. 파란색, 분홍색, 노란색, 회색, 금색, 은색에 심지어 검은색까지 있었다.
순백이 웨딩드레스 색상을 평정하게 만든 주인공이 있다. 바로 영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빅토리아 여왕(1819∼1901)이다. 왕위에 오른 그녀가 누구와 결혼할지는 세기의 관심사였는데, 그녀는 독일 삭스-코버그 공국의 알베르트 왕자와 사랑에 빠졌다. 결혼식에서 최고의 신부가 되고 싶었던 여왕의 선택은 흰색이었다. 웨딩드레스를 비롯해 결혼식장 자체를 그야말로 화이트 일색으로 꾸몄다.
그 화려함이 회자되면서 여왕의 순백 웨딩드레스는 뭇 여성들의 로망이 됐다. 하지만 쉽게 입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당시는 진한 염색의 기술보다 흰색을 내는 표백 기술이 더 어려워 그만큼 값이 비쌌기 때문이다. 20세기 들어 기술이 발전하면서 순백 웨딩드레스에 대한 로망은 비로소 현실이 될 수 있었다.
의상학을 공부하는 저자가 쓴 이 책은 이렇듯 웨딩드레스에서 지퍼, 모자, 속옷, 가발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입고 걸치는 모든 것에 숨겨져 있는 역사를 들추어낸다. 유행이 되기까지 눈물겨운 인간 승리의 드라마도 있다. 1891년 윗콤 저슨의 발명품으로 출발한 지퍼의 역사는 지난하다. 저슨은 대박을 예상하고 ‘유니버셜 패스트너 컴퍼니’를 세웠으나 ‘패스트너(여밈기·지퍼의 전신)’는 처음에 외면 받았다. 지퍼가 주목을 받은 건 비 오는 날 정장 구두 위에 덧신는 갈로 슈즈에 지퍼를 부착하면서부터다. 신고 벗기 편하게 해준 편리성이 빛을 보기 시작하면서 지퍼는 가루담배 주머니, 우체부 가방, 군인 침낭 등으로 쓰임새가 확산되면서 날개를 달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듯 패션의 역사를 더듬는 저자가 일관되게 던지는 질문이 있다. 바로 인간에게 옷이란 무엇인가이다. 패션은 누군가에게는 그저 신체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지만, 누군가에겐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나타내는 것이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혹은 사람을 구속하는 억압이기도 했다. 그 결과 패션은 때로는 황당하리만치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의 슬픈 역사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17세기 프랑스에서 잘 나간다는 고관대작들은 모두 빡빡머리였다. 그들은 모두 페루크(가발)를 썼다. 그리고 거기에 밀가루를 뿌리고 다녔다. 가발 모양을 좋게 하기 위해서였다. 대머리였던 루이 13세가 불러일으킨 가발의 유행은 이렇듯 지금의 기준으로는 웃지 못할 촌극을 빚었다.
20세기 페미니스트들은 “가슴에 자유를 허하라!”며 “탑 프리”(가슴을 드러내는 것)를 외쳤지만, 19세기 중반 인도의 하층민 여성들은 거꾸로 “상의를 입게 해 달라”고 시위를 벌였다. 당시는 하층계급 여성에게 상의를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신분의 낙인을 찍었던 것이다. 책은 종교적 신념 때문에 옷을 벗지 못하는 운동선수, 유행 때문에 멸종 위기에 몰린 동물 등 패션의 부정적 측면도 소개한다.
이 모든 패션의 역설은 누군가와 같아지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누군가와 달라지고 싶다는 모순된 욕망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패션이야말로 ‘옷’이 아닌 ‘욕망’을 걸친 인간의 자화상이라고 결론짓는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