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떠난 돈 잡아라”… 여의도-을지로 금리전쟁

입력 2013-03-27 18:30 수정 2013-03-27 22:22


“5, 4, 3, 2, 1… 클릭!”

지난 25일 오전 9시. KDB대우증권 강남지점에서 이모 PB(프라이빗뱅커)는 초긴장 상태였다. 월요일 오전 9시 정각마다 시작되는 연 4.0% 확정금리형 RP(환매조건부채권) 특별판매에서 물량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단말기의 예약 버튼 위에 마우스를 가져다 두고 미동도 하지 않던 이 PB는 맞춰둔 알람이 울리는 순간 재빠르게 클릭을 했다.

이PB는 매주 이 시각만 되면 동료 PB들과 소리 없는 경쟁을 벌여 왔다. 온라인 매수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매주 한정된 200억원의 물량이 ‘완판’되기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불과 1∼2초였다. 올 들어 13회 투자자를 모집한 대우증권의 특판 RP는 총 2700억원이 넘게 팔렸다. 최근 1개월 동안만 920억원을 모집했다.

“예약에 성공했습니다.” 몇 십년 같은 몇 초가 흐르고 단말기에서 매수 예약 메시지가 확인되자 이PB는 비로소 긴장을 풀었다. ‘이젠 RP 매수를 신신당부한 자산가에게 당당하게 전화를 걸 수 있겠다’는 생각에 홀가분했다. 이PB는 지난주에는 눈을 깜빡해서, 2주 전에는 긴장한 나머지 클릭을 엉뚱한 곳에 하는 바람에 RP 특판에 참여하지 못했다. 이PB가 관리하는 자산가는 이PB를 만날 때마다 “연 4.0%를 요즘 어디 가서 찾느냐”며 “얼른 가입해야 한다”고 재촉했었다.

RP 열광 현상은 서울 여의도 증권가가 을지로 은행가를 향해 벌이는 소리 없는 전쟁에 따른 결과다. 증권사들은 금융소득종합과세 강화로 이탈한 고액 자산가의 은행 예금을 증권사로 흡수하는 데 사활을 걸었다. 5만명에서 20만명으로 늘어난 금융소득종합과세 대상, 올 들어 은행에서 빠져나온 12조원. 여의도는 그 돈을 끌어오기 위해 을지로에 선전포고를 했다.

여의도 증권가가 꺼내든 ‘쩐의 전쟁’의 무기는 ‘금리’였다. 증권가는 지긋지긋한 저금리 기조의 틈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을지로 은행가의 정기예금 금리가 시나브로 3%대 초반까지 하락한 순간 여의도 증권가는 일제히 연 4.0%를 넘는 RP 특판을 실시했다.

채 1% 포인트도 안 되는 금리 차이였지만 시장의 반응은 엄청났다. 1년 만기 RP를 연 4.0%의 금리로 특별판매한 한국투자증권은 27일 350억원의 물량이 전부 소진됐다고 밝혔다. 연 4.0%였던 삼성증권의 RP도 1억원 이상 예탁 고객만을 대상으로 하는 까다로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지난달 600억원이 2주 만에 전부 팔려나갔다. 연 5.0%를 내세운 우리투자증권의 91일물 특판 RP는 이달에만 1000억원이 완판됐다.

선착순에서 탈락한 고객들의 원성으로 일부 증권가는 RP를 추가 판매하고 있다. 삼성증권은 연 5.0%의 RP 360억원을 추가 판매 중이다. 이날까지 남은 한도는 40억원에 불과하다. 한국투자증권은 추가 물량을 대폭 늘려 6월 26일까지 1700억원을 팔기로 했다.

증권가의 금리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일부 증권사는 시중은행들의 회전형 저축 금리가 2% 중반에 머무르는 점을 겨냥해 3개월 만기의 통화안정채권(통안채) 영업을 강화하고 있다. 은행보다 높은 연 3.4∼3.5%의 확정형 금리를 제시한 것이다. NH농협증권의 경우 지난 1월 중순 3.5% 금리로 판매한 통안채는 4일간 150억원이 팔렸고, 10일 만에 초기 설정한 300억원이 매진됐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