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향에 취하고 산수유에 눈멀다… 광양 섬진마을·구례 상위마을에 꽃구름 내려앉은 듯 만개
입력 2013-03-27 17:04
가는 봄날이 너무 아쉬워서일까. 섬진강 매화와 지리산 산수유가 순식간에 꽃망울을 활짝 터뜨렸다. 예년보다 추운 날씨 탓에 열흘 넘게 지각개화를 하더니 흰색 물감과 노란색 물감을 엎질러 버린 듯 섬진강과 지리산 자락이 화려한 수채화로 거듭났다. 이에 질세라 하동의 화개장터 벚나무도 꽃망울이 터질 듯 부풀기 시작했다. 이번 주말 남도행을 감행한다면 눈송이처럼 흩날리며 낙화하는 하얀 매화꽃잎과 팝콘처럼 톡톡 터지는 연분홍 벚꽃, 그리고 샛노란색에서 노란색으로 옅어지는 산수유꽃이 함께 피어있는 풍경화를 만날 수도 있겠다.
섬진강에서 가장 먼저 봄소식을 전하는 꽃은 사군자 중 으뜸인 매화. 은은한 향으로 상춘객을 유혹하는 매화는 전남 광양의 다압면 일대를 하얀 구름처럼 뒤덮고 있다. 특히 섬진강 서쪽을 달리는 861번 지방도 중 섬진교와 남도대교를 잇는 19㎞ 구간은 산비탈과 골짜기는 물론 마을 고샅과 강변까지 곳곳에 매화꽃이 활짝 피어 눈이 부실 정도.
실핏줄 같은 섬진강을 따라 두루마리처럼 펼쳐지는 20여 강마을 중 상춘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청매실농원으로 유명한 섬진마을. 매화마을로도 불리는 섬진마을은 산비탈과 골짜기는 물론 마을 고샅까지 매화나무가 지천이다. 그중에서도 청매실농원은 3000개가 넘는 장독과 대숲이 수천 그루의 매화나무와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한다. 청매화 고목이 멋스런 장독대 아래 진입로는 매화나무 묘목과 봄나물 등을 파는 마을 아낙들로 작은 장터를 이룬다.
봄 햇살이 따스한 청매실농원의 장독대 옆 오솔길은 상춘객들이 즐겨 찾는 산책로. 팔각정 전망대에 오르면 문학동산 너머로 전라도와 경상도를 흐르는 섬진강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의 세트장인 초가집 주변의 문학동산에는 섬진강 시인으로 불리는 김용택을 비롯해 성삼문, 이병기, 윤동주, 김영랑, 정호승 등 유명 시인들의 시 30여 편이 커다란 바위에 새겨져 시심을 돋운다.
매화는 한밤에 더욱 매혹적이다. 백운산 너머로 해가 지고 섬진강의 하늘이 암청색으로 물들면 백매화가 더욱 하얗게 빛난다. 이어 달이 떠오르고 어둠에 묻혔던 섬진강 물줄기가 모습을 드러내면 달빛에 젖어 더욱 하얀 매화가 은하수가 내려앉은 듯 백운산 자락을 수놓는다. 매화 향기를 암향(暗香)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밤이 깊어 사위가 적막할 때 비로소 은은한 향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광양이 매화의 고장이라면 강 건너 경남 하동은 벚꽃의 고장이다. 하동의 벚꽃은 유홍준씨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이 세상에 둘이 있기 힘든 아름다운 길”이라고 극찬한 섬진강변 19번 국도를 비롯해 쌍계사 가는 길을 연분홍색으로 채색한다.
하동에서 벚꽃이 가장 아름다운 구간은 벚나무 가로수가 연분홍 터널을 이루는 평사리 입구에서 화개장터까지 9㎞와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 5㎞. 이 중에서도 왕복 2차선의 벚꽃길이 상행선과 하행선으로 갈라지는 화개초등학교 주변의 벚꽃 길은 수령 70년 가까운 벚나무 고목에서 핀 꽃잎이 하늘을 빈틈없이 가린다.
화개장터에서 19번 국도를 타고 전남 구례 읍내를 지나 지리산 만복대 기슭에 위치한 구례 산동면에 들어서면 온 마을이 붓으로 노란 물감을 찍어 점묘화를 그린 듯 광활하게 펼쳐진다. 산비탈과 논두렁은 물론 밭둑과 고샅에도 샛노란 꽃구름이 내려앉은 듯하다. 산수유꽃이 피는 마을은 상위마을을 비롯해 반곡마을, 계척마을, 현천마을 등 산동면 일대의 크고 작은 30여 마을.
‘산동’이란 지명은 1000년 전 중국 산둥성의 처녀가 지리산 산골로 시집오면서 가져온 산수유 묘목을 심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구례의 산동(山洞)과 중국의 산둥(山東)은 한자 이름은 다르지만 같은 산수유 주산지. 19번 국도변에 위치한 계척마을에는 수령이 1000년쯤 된 산수유 시목(始木)이 올해도 샛노란꽃을 활짝 피웠다.
노랗게 물든 상위마을 풍경을 한눈에 보려면 마을 정자인 산유정에 올라야 한다. 만복대 자락에서 흘러내린 부드러운 곡선의 다랑논과 마을 한가운데를 흐르는 개울, 그리고 대숲과 산수유 군락이 점묘화와 다름없다. 푸른 이끼로 뒤덮인 엉성한 돌담 안에는 예외 없이 산수유 고목이 군락을 이룬다.
상위마을 아래에 위치한 반곡마을의 대평교는 드라마 ‘봄의 왈츠’를 촬영했던 곳으로 사진작가들이 많이 찾는 곳.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 아래에는 떡판처럼 펑퍼짐한 수천 평 넓이의 널름바위가 계곡을 뒤덮고, 산수유나무는 계곡에 가지를 드리운 채 황홀한 봄날을 보내고 있다.
산수유가 가장 아름다운 마을은 견두산 자락에 위치한 현천마을. 돌담에 둘러싸인 함석집들이 옹기종기 어깨를 맞댄 현천마을은 마을 전체가 산수유나무 고목에 파묻힌 꽃동네. 마을 입구 저수지에 비친 산수유꽃의 반영은 데칼코마니 그림을 보는 듯하다. 반쯤 허물어진 돌담과 발갛게 녹슨 함석지붕이 더 어울리는 산수유나무. 척박한 땅에서 더 아름답게 피는 구례의 산수유꽃은 맑은 날 역광에 형광색으로 빛날 때 더욱 황홀하다.
구례·광양=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