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를 넘어 함께하는 우리로 (13)] “천마디 말보다 행동”… Y의 큰 물결로 흐르다
입력 2013-03-27 17:20 수정 2013-03-27 21:19
YWCA 인물산책 ‘길을 따라서’-김필례
한국 YWCA의 초대 총무 김필례(장로교 지도자 대표) 선생은 김활란, 유각경과 함께 한국 YWCA를 창설한 인물이다. 그런데 김필례라는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선생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천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으로 실천하는 인물이었다. 한국 여성을 억누르던 전통적 가부장 사고에 맞서 여성의 ‘권리와 자유’를 모색하며 누구보다 묵묵히, 그러나 적극적으로 한국 YWCA 설립에 앞장섰다.
개혁의식을 배우다
김 선생은 1891년(고종 28년)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소래마을)에서 아버지 김성섬과 어머니 안성은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집안에는 교육을 중시하고 독립의식이 투철한 선각자들이 유독 많았다.
105인 사건에 연루된 독립운동가 김필순은 선생에게 아버지 역할을 하는 오빠였다. 그의 바로 위 형부는 독립운동가 김규식 박사였다. 여성 독립운동가 김마리아는 선생보다 4개월 어린 조카였다. 이런 집안 내력을 바탕으로 선생은 당시의 ‘신여성’들처럼 해외 유학을 통해 자신의 지성을 넓힐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 유학(1908∼1916) 중에 학문을 습득하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곳에서 YWCA를 만나면서 한국 YWCA 탄생의 초석을 놓았다.
Y를 만나다
한국에서 YWCA 활동을 처음 체험한 분이 바로 김 선생이다. 그는 1909년 4월 도쿄여자학원 중등부에 입학, 서양사를 공부했으며 7년 만인 1916년 도쿄여자고등부를 졸업했다. 당시 학교 기숙사는 겨울방학이 되면 난방을 틀어주지 않았다. 선생은 방학이면 YWCA 기숙사에서 지내게 됐다. 이 때 기숙사에서 경험한 두 가지가 나중에 한국 YWCA 설립의 원동력이 됐다.
우선 선생은 YWCA 기숙사에서 이론과 실천의 조화를 배웠다. YWCA 기숙사에서는 예수의 사상을 가르치면서 예수처럼 살아갈 것을 강조했다. 또 당시 일본 YWCA 총무인 가와이 미치코(川井道子)의 인격에 매료됐다. 가와이는 일본의 한국 침략에 대해 양심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선생은 약소국에 대해서도 예수의 인류애를 강조하는 가와이와 같은 사람이 일하는 YWCA가 한국 여성들의 미래를 밝혀줄 단체임을 확신했다. 졸업과 동시에 선생은 한국으로 돌아와 정신여학교 교사로 지내면서 YWCA 설립을 늘 갈망했다.
Y를 창설하다
선생은 1920년 내한한 미국 YWCA 위원들을 만났다. 미국 위원들은 일본 YWCA 동맹 산하 기관으로서 한국 YWCA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선생은 이를 거부했다. 일본의 한국 강점을 인정하면서 한국 YWCA의 첫 발을 내디딜 수 없었다. 오히려 1922년 WSCF에 참석한 가와이를 만나 세계 YWCA가 한국 YWCA의 독립된 대표권을 인정하도록 적극적인 협조를 하겠다는 다짐을 받아낼 정도로 독립된 한국 YWCA를 원했다.
선생은 김활란, 유각경, 신의경, 김성실, 김함라 등과 함께 1922년 6월 13일부터 12일 동안 협성 여자성경학원에서 전국에서 온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제1회 ‘조선 여자 기독교 청년회 하령회’를 결성했다. 그해 하령회는 ‘새로운 정신을 가지고 조선사회를 위해 일하고자 하는 여자들에게 일층 원기를 주고 자각을 주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특히 축첩, 이혼, 공창 문제 등 당대에 첨예하게 드러난 여성 관련 문제들도 활발히 논의했다. 마지막날 65명의 참가자들은 한국 YWCA의 명칭을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기성회’로 정했다. 그는 총무로 선출됐다.
한국 YWCA는 외국의 원조 없이 한국 여성들의 자발적인 참여에 의해 창립됐다. 배움과 실천을 호소하는 김 선생은 전국을 돌며 강연했다. 선생은 1922년 11월 5일부터 12월 14일까지 5개 도시와 11개 여학교를 순회하면서 지부를 조직했다. 같은 해 10월 김 선생과 양응도, 김함라, 임자혜 등에 의해 광주YWCA가 조직됐고 12월에는 유각경, 신의경 등의 노력으로 경성YWCA가 창설됐다. 1923년 8월 18일부터 열린 제2회 하령회 및 총회에서 5개 도시 11개 학교 대표 70여명은 ‘조선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 기성회’의 명칭을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로 수정하기로 결의했고 연합회의 헌장과 세칙을 통과시킴으로써 연합회 조직과 기구 구성을 마무리했다. 같은 해 11월 YWCA의 회원은 2000명에 달했다. 선생은 1927년 미국 컬럼비아대에 유학하면서 뉴욕시 한인교회를 중심으로 회관 건립을 위한 모금활동을 펼쳤다.
김필례 선생은 YWCA 창립 30주년(52년)과 창립 50주년(72년) 기념 때 표창장과 공로상을 받았다. 1961년 한국 YWCA는 선생의 칠순을 축하하며 백금지환을 전달했다. 정부는 YWCA 설립 공로를 인정, 1972년 8월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여했다.
Y의 역사가 되다
한국 YWCA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자기 삶에 실천함으로써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건설함을 목적으로 한다’이다. 김 선생이 경험했고 감화받았던 YWCA의 배움과 실천의 덕목은 오늘 한국 YWCA의 목적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한국사회의 변혁을 위한 여성 물줄기로 영원할 것이다.
“눈부시게 발전하는 YWCA의 활동을 눈여겨보면서 제가 다만 바라는 것은 이런 여러 가지 지식을 전달하는 데만 그치지 말고 반드시 이 활동을 통해 YWCA의 근본 목적 곧 우리 구주를 그들에게 소개해 자기들의 살 길을 찾고 근처 교회의 교인이 되게 하는 데까지 그들을 돌보아 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김필례 선생의 ‘45년 전 YWCA를 돌이켜보면서’ 중에서)
박혜경 <대만 장영대학교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