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이영훈] 새 생명 주는 영혼의 봄
입력 2013-03-26 21:08
“꽃샘”의 의미는 ‘꽃이 필 때 갑자기 추워짐’이다. 그러니 흔히 쓰는 “꽃샘추위”라는 말은 동어반복이다. ‘꽃이 피는 것을 샘내다’라는 뜻으로 풀어낼 수 있는 이 말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맛깔나는 이름씨의 하나이다. 이 말과 비슷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말이 있다. ‘봄이 왔지만 봄 같지가 않다’를 뜻하는 말이다. 천하 만물을 꽁꽁 얼게 한 동장군을 밀어내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기에 해마다 이맘때면 여지없이 이 같은 표현들이 등장한다.
누구나 따뜻한 봄날 같은 인생을 꿈꾸지만 우리 네 삶의 진정한 봄은 계절의 변화와 함께 자동적으로 찾아오지는 않는다. 사실 우리를 둘러싼 정치·경제·사회·교육·문화·군사적 환경에서 봄의 전령의 흔적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새봄은 저 산과 들판의 차지일 뿐 우리 사회의 불의와 허위와 아픔은 지난겨울과 함께 물러가지 않고 강하게 버티고 있다.
혼란과 절망적 상태의 현대인
그러기에 T S 엘리엇이 일찍이 ‘황무지’에서 갈파한 것처럼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인지도 모른다. 봄비를 머금은 라일락이 제아무리 꽃을 피우려 해도 죽은 땅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시인은 삶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찾지 못하는 현대인의 혼란과 절망적 상태를 날카롭게 진단하고 이를 꽃피우지 못하는 봄의 약속에 빗대어 표현했다. 하지만 이러한 해부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보여주기만 할 뿐 정작 우리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구원을 얻게 하지 못한다.
엘리엇의 가문이 가졌던 유니테리언 신앙은 지적이었고, 도덕적이었고, 이타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의 핵심을 소홀히 했을뿐더러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부활의 능력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 같은 영향권 아래서 젊은 엘리엇은 정신적·영적 공허감의 황무지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방황이 종식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임재와 능력을 붙잡은 후였다.
이제 4일 후면 부활절이다. 부활절이 온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최고의 축제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또한 장차 부활에 동참할 것에 대한 예표가 되기 때문이다.
교회는 AD 325년 니케아 공의회 이래로 춘분 후 첫 만월이 지난 첫 주일을 부활주일로 지키고 있다. ‘절대 절망’ ‘절대 죽음’의 상태를 단번에 ‘절대 희망’ ‘절대 생명’으로 역전시켜버린 그리스도의 부활이 낮의 길이와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춘분 어간에 일어난 것은 의미심장하다. 낮의 길이가 점차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일조량이 증가해 먹이 피라미드의 최저층을 이루는 식물의 탄소동화작용이 더욱 활발히 일어나 그에 따라 자연계 전체에 생명력과 활력이 충일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새 희망이 넘치는 영적인 봄을
혹자는 부활절이 긴 겨울의 종결과 새봄의 도래를 축하하는 춘분제의 기독교 버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겨우내 살아있던 가지에 때가 되어 새순이 돋는 자연의 이치와 완전히 죽었던 생명이 부활하는 기적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돌고 도는 계절의 변화와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일회적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결코 비교될 수가 없다. 우리가 찾는 인생의 봄도 벚꽃이나 유채꽃처럼 때가 되면 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와 능력이 우리 개인의 삶과 우리 사회에 임할 때 비로소 새 희망이 넘치는 영적인 봄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지 않을 때는 그저 춘래불사춘의 상태만 지속될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새 생명이 개인과 가정, 교회와 사회, 우리나라와 전 세계에 널리 퍼짐으로써 꽃샘을 뛰어넘어 새 생명을 불어넣는 진정한 봄기운으로 충만하기를 희망한다.
이영훈 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