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박정태] 작은 영화 ‘지슬’이 말한다

입력 2013-03-25 20:17


진짜 가슴이 먹먹하다는 느낌이 가장 적합한 표현일 것 같다. 구름바다 건너 연기 자욱한 초가집, 널브러진 놋쇠그릇을 앵글에 담은 첫 장면부터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자연을 배경으로 한 흑백의 영상미는 독특하고 뛰어나다. 그 흑백이 주는 느낌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처연함이다. 소소한 일상에 대한 순박한 농담도 간간이 있다. 그렇지만 그게 웃음을 짓게 만들지는 않는다. 대사는 온통 제주 사투리라서 자막까지 흐른다. 자신은 한 줌의 재가 되더라도 아들네를 위해 감자 몇 개를 품속에 안고 숨져간 할머니…. 무겁고 숙연하고 비장하다.

엔딩 자막이 나와도 일부는 자리를 뜨지 못한다. “제주바당에∼배를 띄앙 노를 젓엉∼혼저나 가게… 제주사름덜 살앙죽엉 가고저 허는게 이어도 우다∼이어도 사나∼” 이별이 없는 영원한 이상향에 대한 염원을 노래한 제주 민요 ‘이어도사나’가 엔딩곡으로 흘러나오며 가슴을 후빈다. 시종 마음이 불편하다. 그렇다고 의도적으로 이념을 강조하거나 눈물과 분노를 유발하지는 않는다. 치유와 화해의 메시지를 담으려 했으니까.

치유하고 화해하자는데

제주발 북풍이 거세다. 이달 1일 제주에서 개봉해 지난 21일 전국 80여개 상영관으로 확대된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 2’. 제주 4·3사건이라는 역사의 아픈 상처를 소재로 1948년 11월에 벌어진 주민과 토벌군의 이야기를 담는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4개 부문, 올해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과 브졸국제아시아영화제 황금수레바퀴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배우 강수연이 상영관 한 회 티켓 전량을 사서 팬들에게 증정하는 등 각계 인사들이 관람 캠페인에 나선 바로 그 영화다. 24일 현재 관객 3만명을 돌파하며 독립영화로서는 이례적으로 흥행 바람을 이어가고 있다(독립영화 흥행기준선은 1만명).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좌·우익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무고하게 희생당한 4·3사건은 2000년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된 이후 3년 만에 정부의 진상보고서가 채택됐지만 아직도 논쟁이 현재진행형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인명피해는 2만5000∼3만명으로 추정됐다. 국가 차원의 공식 사과가 있었지만 유족들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다. ‘지슬’의 오멸 감독이 본보 인터뷰에서 “6·25전쟁 다음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도 역사 정리가 안 돼 있어 제주 사람으로서 갖는 부채감이 마음 한쪽에 있었다”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 역사를 불러내 현재화했고, 희생된 주민과 군인 모두를 위한 진혼곡으로 이 영화를 바친 것이리라.

그럼에도 일각에서 이념 문제로 재단하고 악담을 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일부 극우단체 네티즌들은 “좌익 시각 영화” “감성팔이 선동영화” “빨갱이들이 고마워할 영화” 등의 악평을 늘어놓기도 한다. 물론 과거에 그러했듯 사건에 대한 입장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반목과 갈등에서 벗어나 비극의 역사로 인한 상처를 보듬자고 하는 마당에 이 같은 문자폭력은 언어도단이다. ‘지슬’이 말하는 건 소통과 위로, 치유, 용서, 화해, 그리고 미래의 희망 아닌가.

대통령은 진정으로 화답할까

요즘 제주는 4·3사건 65주기를 맞아 추모 및 문화예술행사 준비로 여념이 없다. 미완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 정부의 역할도 주문한다. 최근 제주4·3희생자유족회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다음 달 3일 4·3위령제에 참석해달라고 요청한 상태다. 대선 후보 시절 4·3 희생자와 가족들이 겪은 아픔을 치유하는 일에 앞장서겠다고 약속한 점도 상기시켰다. 대통령이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지는 알 수 없으나 ‘약속’과 ‘대통합’ 발언의 진정성을 보이려면 유족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게 맞지 않나 싶다. 작은 영화의 울림이 크다.

박정태 문화생활부장 jt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