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조용래] 고난주간에 맞는 3·26
입력 2013-03-25 20:06
한 남자가 어린 나귀에 탄 채 앞장을 서고 그 뒤로 일행인 듯한 이들이 도성으로 들어왔다. 남루한 행색이었지만 이들을 지켜보는 일부 사람들은 환호하며 외쳤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이여, 복이 있으라.”(누가 19:38)
오래전 민중신학자 안병무(1922∼96)가 한 강연에서 소개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을 조금 부풀려 그려봤다. 그의 논집 ‘구걸하는 초월자’(1998)에도 실려 있는 얘기인데 ‘서울 명동 한복판에서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해보면 그 풍자적인 장면은 훨씬 더 실감나게 다가올 것이다.
교회에서는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종려주일로 기리는데 이로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된다. 패왕적인 메시아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성경은 되레 우화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더구나 이 행보가 왕으로의 등극은커녕 십자가 처형으로 이어지는 출발점이라는 사실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런데도 그 일행을 환호한 무리들이 있었음을 주목해봐야 한다. 그들은 진실을 보았고 초라한 행각에 기꺼이 동참했다. 그들은 부와 명예와 지위와는 거리가 있고 비록 고난으로 점철돼온 삶 가운데 있었으면서도 실체를 증거하고 고난 너머 저편을 바라보며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다.
분단된 한반도에 다시 고난의 바람이 거세다. 분단과 전쟁, 그리고 끊이지 않고 이어져온 파멸적인 대립은 때로 위기감을 증폭시켰고 그 와중에 지친 사람들은 현실을 잊고 가짜 평화에 취하기도 했다. 요즘 북한은 핵무기를 앞세워 하루가 멀다고 증오로 가득한 폭언을 쏟아내고 있다.
잊고 있었던 이 땅의 고난이 예전보다 더 생생하게 이어지고 있다. 3년 전 3월 26일 오늘, 서해에서 피폭·침몰된 천안함과 함께 가라앉은 46명의 해군 장병들과 이들을 찾다가 과로로 쓰러지고 사고로 숨진 이들만큼 고난 속 한반도의 강렬한 증거는 없다. 참담했던 그들의 고난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천안함 폭침 3주기를 맞는 오늘은 때마침 고난주간이다. 십자가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담담하게 우화적인 장면을 연출했던 주님의 일행과 이들을 지켜보며 환호했던 사람들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찔리심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이사야 53:5)
폭풍전야처럼 한반도의 고난이 깊어가고 있다. 하지만 산화돼 흩어진 젊은이들이 대속한 고난은 십자가의 그것만큼 우리 가슴에 오래 머물 것이니 참 평화 또한 멀지 않았으리라.
조용래 논설위원 choy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