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맹경환] 2013년 키프로스, 1997년 한국
입력 2013-03-24 19:04 수정 2013-03-24 20:04
지중해 터키 밑의 작은 섬나라 키프로스. 국제통화기금(IMF) 통계 기준으로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은 240억 달러로 우리나라의 2%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여서 그런지 그동안 뉴스의 관심에서는 멀어져 있었다. 그래도 인구가 100만명 정도인 덕분에 1인당 GDP는 우리보다 높아 잘사는 나라다.
키프로스가 지금 세계 언론의 관심이 된 건 구제금융 없이는 디폴트(채무불이행) 선언을 할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잠잠해지고 있던 유럽의 재정위기의 불씨가 다시 살아 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다른 측면에서는 예금에 대한 과세라는 듣도 보도 못한 황당한 해법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은행에 예금을 했으면 적더라도 이자를 받아야 하는데 세금을 내라니 그 나라 국민들로서는 황당한 일이다.
유럽연합(EU)과 IMF는 키프로스에 구제금융 100억 유로를 지원할 테니 키프로스도 자체적으로 58억 유로를 마련하라며 그 방법으로 은행 예금 과세를 요구했다. 그 과정에서 독일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키프로스에 들어갈 100억 유로 가운데 30억 유로는 독일의 몫이고 독일 국민들은 남의 나라 돕는데 왜 우리 세금을 내느냐고 아우성이었다. 9월 총선을 앞두고 있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국민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강력한 분담안을 밀어붙였다.
결국 은행 예금 과세는 기본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국민들도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가 숨어 있다. 물론 키프로스 은행권 예금 680억 유로 가운데 200억 유로가량이 러시아계 자금이어서 러시아를 겨냥했다는 분석도 있지만 말이다.
키프로스 국민들은 저항했고 정부도 물러서서 당초 예금 전체에 세금을 매기려던 계획을 수정해 면세 기준도 마련하고 규모별로 차등 과세하는 수정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 수정안마저도 국회의 비준을 받지 못했다.
키프로스를 보면서 1997년 말 우리나라가 IMF의 돈을 받을 때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당시 멕시코에 이어 태국과 인도네시아 등이 흔들린다는 얘기가 들려도 우리는 안심했다. 그해 대선을 앞두고 있어 정부는 우리의 위기 상황을 덮고 쉬쉬했다. 느닷없이 국민들은 당했다. IMF와의 구제금융 협상은 비굴했다. IMF는 점령군이었고 돈을 주는 대신 우리나라에 강도 높은 긴축재정과 성장률 목표 하향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기업과 금융기관의 구조조정, 대기업의 체질개선, 노동 유연성 제고 등을 강제했고 우리나라는 그대로 수용했다. 결과는 처참했다. 알토란같았던 우리 기업들은 속속 외국인의 손으로 넘어갔고 구조조정으로 국민들은 직장에서 쫓겨났다. 이때 양산된 비정규직과 자영업자들은 지금껏 우리 경제의 골칫거리로 남아있다.
2013년의 키프로스와 1997년의 대한민국의 공통점은 잘못은 정부가 해놓고 책임과 고통은 국민들의 몫이라는 점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키프로스는 저항했고, 우리는 그대로 굴복했다. IMF 수장까지 구제금융의 대가로 살인적인 긴축을 요구했던 당시의 정책에 반성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니 더욱 아쉽기만 하다.
IMF 위기 당시 부모님은 일자리를 잃으면서 한동안 고생을 하셨다. 금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던 지난해 집에 금 좀 있지 않느냐고 묻는 아들에게 “금 모으기 운동 할 때 다 팔았는데”라고 하셨다. 그게 국민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그렇게 착한 국민들에게 무엇을 해 주었고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 씁쓸한 질문을 던져본다.
맹경환 국제부 차장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