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애슐리 박 (7) 세 아이 엄마의 당찬 도전 “열방을 섬길 수 없을까?”

입력 2013-03-24 16:56


청년부를 담당하며 학생들이 학업에 매진하는 한편으로 열방을 경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의 은사와 재능으로 열방을 섬길 수 있는 길이 없을까. 그러던 중 2004년 겨울, 앤아버 지역 청년들의 연합선교집회에서 그 방법을 찾았다.

미국 중서부에는 대학들이 많다. 그곳에는 한국 유학생들이 많다. 일리노이, 인디애나, 오하이오, 미시간 등지에 있는 한국 유학생들이 여름방학 동안 몽골의 대학에 가서 봉사하는 단기사역에 참여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각지에서 모인 학생들 70여명은 연초부터 모여 준비했다.

학생들을 보내기 전에 2005년 5월 내가 먼저 단기선교를 다녀오기로 했다. 그런데 떠날 시간이 다가올수록 내 상황이 말이 아니었다. 돈 문제에 관한 한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관점에서 살기로 마음먹은 이후 예기치 않은 일들에 직면해야 했다. 또 어떤 이유에서인지 남편을 포함해서 식구들이 괜히 미워지기 시작했다. 악한 내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몽골에 선교를 하러 간다는 것은 사실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내 결심은 더욱 굳건해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5월말에 몽골로 떠나리라는 생각에 경제적으로 어려우면서도 일찌감치 비행기표를 구입했다. 몽골로 떠나기 전 주일날 파송예배를 드렸다. 아마 우리 교회 최초의 단기선교였다.

어린 아이들 셋을 두고 단기선교를 떠나는 나를 위해 많은 성도들이 기도와 재정으로 후원해 주셨다. 주일날 파송예배를 마치자 멀찍이서 보고 계시던 할머니집사님이 다가오신다. “쯧쯧쯧…어린 아이들 놔두고 떠나니, 애∼고, 어미 마음이 워쩔꼬…. 걱정 말고 다녀오소. 내가 기도해 줄거구만.” 새벽기도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실 할머니의 모습은 내게는 더할 나위 없는 위로였다.

교회문을 나서는데 지원(영어 이름:프랜시스)이의 친구인 모니카가 나를 불러 세운다. “프랜시스 엄마, 내가 내일부터 매일 밤 자기 전에 꼭 기도해 줄게요∼” ‘그래 모니카, 프랜시스 엄마 위해 기도하는 거 잊으면 안 돼!’ 밤마다 침대 곁에서 고사리 같은 손을 모으고 드리는 어린 모니카의 기도를 하나님이 어찌 외면하시겠는가.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았다.

몽골에서 지내는 2주의 시간은 20년보다 더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그리 대단하지 않은 지식으로 그들을 가르치는데, 나의 보잘것없는 것들이 어느새 너무도 귀한 것으로 탈바꿈돼 전달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떠나라는 명령에 순종했을 때 드러나는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몽골대학생들은 아줌마교수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부어줬다.

몽골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였다. 얼굴에 콧물자국이 뚜렷한 여자아이가 도대체 내 곁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사랑에 굶주린 아이인가 봐. 그래, 이 아줌마를 통해 듬뿍 사랑을 느끼렴.’ 아이를 옆에 앉혀놓고 쓰다듬어 주고 있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네가 이 아이에게 사랑을 주고 있는 거라 생각하니. 아니, 이 아이가 내게 자기의 사랑을 쏟아 붓고 있는 거지. 이 꼬마가 너를 축복하고 있는 거란다’

첫 단기선교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다. 마지막 날, 나는 그들과 헤어지기 아쉬워 엉엉 울었다. 사역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땐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신 많은 분들이 고마웠다. 특히 할머니집사님과 어린 모니카의 기도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몽골에서처럼 평생을 그렇게 살고 싶었다.

정리=최영경 기자 yk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