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김용우] 어릿광대의 정치

입력 2013-03-24 19:42


이탈리아 의회가 한 달 내내 검은 연기만을 내보내고 있다. 예상을 깨고 이틀 만에 시스티나 성당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라 새로운 교황 선출을 알렸던 바티칸의 콘클라베와는 대조적이다. 총선이 끝난 지 한 달이 다 돼 가지만 새 정부의 윤곽조차 오리무중일 정도로 이탈리아 정국이 혼선을 보이기 때문이다. 유럽 3위의 경제규모를 자랑하는 이탈리아의 미래가 안개 속에 갇힌 만큼 세상 사람들의 우려도 깊어 보인다.

안개 정국의 장본인은 물론 총선 결과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우파 자유인민당과 베페 그릴로의 오성운동이 루이지 베르사니의 민주당을 뒤이어 서로 매우 근소한 차이로 2위와 3위를 차지했다.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는 이탈리아는 상원과 하원 모두에서 과반을 획득한 정파만이 새 정부를 구성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1위를 차지한 민주당이 하원에서는 과반을 얻었지만 상원에서 과반을 획득하는 데는 실패했다. 득표율에 따른 의원 배분 방식을 상원과 하원에 다르게 적용하고 있는 이탈리아 의회제도 때문이다. 따라서 연정만이 새 정부가 들어설 유일한 길이 됐다. 하지만 문제는 세 정파의 입장이 사뭇 달라 협상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는 점에 있다.

총선 결과 역시 의외다. 베를루스코니의 자유인민당이 2위를 차지한 것이 그렇고 그릴로의 오성운동이 3위에 오른 것은 더욱 그렇다. 부패와 미성년자 성매수를 비롯한 온갖 추문에 휩싸인 베를루스코니지만 예상을 깨고 이번 총선에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날카로운 정치 풍자로 국민 코미디언의 인기를 누렸던 그릴로가 다섯 개의 별을 뜻하는 오성운동을 조직한 지 3년 만에 870만 유권자의 지지를 받아 제3의 정치세력으로 우뚝 선 것은 더더욱 예상 밖이다.

베를루스코니, 그릴로 두 세력 사이에는 공통점이 없지 않다. 둘 모두 긴축 정책만이 재정 위기에 허덕이는 이탈리아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유럽연합 집행부의 충고를 충실히 이행했던 현 정부에 반대한다. 특히 그릴로는 집권하면 유럽연합 탈퇴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긴축의 기치 아래 높아만 가는 세금과 실업률, 반대로 낮아만 지는 소득에 지친 이탈리아인들의 고통과 좌절의 반영인 셈이다. 유럽연합의 긴축정책을 주도하는 독일의 한 유력 정치인이 “이탈리아인들이 두 어릿광대를 선출했다”고 비아냥거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면 베를루스코니와 그릴로는 “독일의 꿈은 유럽의 악몽”이라는 반유럽연합 정서를 대변한다.

그러나 둘 사이의 공통점은 차이점에 비하면 피상적일 뿐이다. 그릴로의 오성운동이 눈길을 끄는 이유는 베를루스코니의 자유인민당은 물론 우파든 좌파든 모든 기성 정치세력을 배격한다는 점에 있다. 자신의 세력에 ‘운동’이라는 명칭을 붙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동시에 다른 정파와 연정을 거부하는 이유도 원칙적으로는 이 때문이다. 30대와 40대 중산층 이탈리아인들이 오성운동에 표를 몰아준 까닭은 민심을 대변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낡은 정치세력에 대한 혐오감 때문이다.

풀뿌리 민주주의를 내걸고 낡은 정치를 넘어서겠다는 전직 코미디언의 오성운동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노벨 문학상에 빛나는 이탈리아의 극작가이자 좌파 지식인 다리오 포는 그릴로를 권력자를 신랄하게 꼬집었던 중세 이탈리아의 저항적 민중 희극의 전통과 연결하며 큰 기대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마치 고급 호텔 체인을 연상시키는 별 다섯 개를 상징으로 내건 그릴로를 포퓰리즘과 파시즘의 전조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파시스트 독재자 무솔리니 역시 그릴로와 마찬가지로 의회민주주의를 경멸하면서 자신의 정치세력에 운동이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이 그렇고, 부패하고 타락한 기성 정치세력을 척결하겠다고 나선 것이 그렇다. 구체적이고 실현가능한 대안 없이 의회민주주의를 공격하는 것이 흔히 독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인 셈이다.

김용우 호모미그란스 편집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