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3부)] “표준치료법 따르면 환자가 내는 돈은 없어요”
입력 2013-03-24 18:08
베를린응급병원 심장내과 전문의 브루흐
“독일인은 의사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을 믿는다.”
지난달 초 독일 베를린 구동독 지역인 바레너가(街) 베를린응급병원 진료실에서 만난 심장내과 전문의 레온하르트 브루흐(사진) 과장은 “독일 병원에서는 모든 의료행위마다 규정이 있다. 모든 게 감시되고 평가받는 시스템”이라고 말했다.
-독일 환자들의 경제적 부담 수준은.
“독일에서 원칙적으로 환자가 내는 돈은 없다. 물론 전제는 있다. 어떤 질병이든, 혹은 사고이든 표준치료법(DRG·우리나라에서 7개 질병군에 도입된 포괄수가제와 동일한 제도)에 따라 치료가 이뤄지면 환자 부담은 한 푼도 없다. 본인부담금 ‘제로(0)’이다. 일터에서 다치면 산재보험이 모든 비용을 댄다. 만약 다쳐서 휠체어를 타야 하는 상황이면 치료비와 재활비용뿐만 아니라 집의 턱을 없애고 경사로를 만드는 비용(주거수리 비용)까지 모두 산재보험에서 처리한다. 만약 휴일이나 휴가 중에 다쳤다면 그 모든 걸 의료보험이 책임진다.”
-모든 질병에 DRG를 적용하는 것이 가능한가. 한국에서는 지난해 7월 포괄수가제가 도입되면서 개원의들이 집단휴원을 예고하는 등 반발이 심했다.
“DRG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복잡하고 정교하게 작성돼 있다. 오랜 기간 검증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다. 이 매뉴얼에 따라 독일 내 어느 병원을 가더라도 평준화된 의료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다. 독일 내 250개 종합병원의 모든 치료기록은 끊임없이 비교, 대조, 평가된다. 똑같이 팔이 부러진 환자에 대해 A병원과 B병원이 각각 어떤 치료법을 사용했는지, 비용은 얼마나 들었는지, 치료효과는 어느 정도인지 비교평가한 뒤 이를 토대로 치료비를 지급한다. 과잉진료가 있었다면 해당 병원은 치료비를 지급받지 못할 거다.”
-정해진 치료법만 허용된다면 신기술이 개발되기 어려운 구조 아닌가.
“DRG가 새 치료법 발전을 저해한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의사들의 몫이다. 꼭 필요하고 효과적인 치료법이라면 의사들이 의료보험조합을 설득해야 한다. 필요성이 입증되면 의료보험에서 돈을 준다. 처음에는 비쌌던 치료법도 널리 활용되면 점점 싸진다. 일종의 평준화 과정이다. 모든 치료법이 이런 설득과 평가, 평준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독일의 병원과 의사들은 불만을 털어놓기도 한다. 한 한국 교민은 “독일 의료시스템은 감시가 너무 심해서 다른 나라로 가고 싶다”는 친구 의사의 하소연을 전해줬다. 조합의 감시가 너무 까다로워 독일 동네 병원들 중에는 보험이 없거나 민간보험을 가진 손님만 받는 곳도 있다. 공공 의료보험조합으로부터 보험금을 받기가 그만큼 까다롭다는 뜻이다. 대형병원들에서 어떤 비급여(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항목) 치료법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지 집계조차 되지 않는 한국과 대조되는 대목이다.
-의학적 지식이 부족한 환자에게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실험적 치료법이 강요되는 일은 없는 건가.
“새로운 요법이라고 환자에게 권하는 일은 허용되지 않는다. 진짜 혁신적인 치료법인데 아직 보험적용이 되지 않는다면, 그 돈은 병원에서 내야 한다. 일종의 실험비용인 셈이다. 병원이 부담할 게 아니라면 의료진이 조합을 설득해서 돈을 받아내야 한다. 환자에게 떠넘길 일이 아니다. 환자가 너무 많은 치료비를 내지 않도록 하는 건 의사들의 의무이다.”
-독일에서는 전문의를 지정해서 진료 받는 ‘선택진료’가 거의 없다고 들었다. 5년차 의사와 30년차 의사가 동일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의사 간 질 차이는 무시되는 건가.
“만약 신참이 하기 어려운 까다로운 수술이라면 틀림없이 경력 규정이 있다. 이를테면 심장수술은 10년차 이상 전문의만 할 수 있다든지. 또 독일에서 대부분의 치료는 팀을 구성해서 함께 의논하고 연구하는 과정을 통해 이뤄진다. 진단과 치료는 의사 한 사람의 책임이 아니다. 팀의 책임이다. 독일에서는 ‘내’ 환자라는 개념도 희박하다. 따라서 독일에서는 환자가 명의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할 필요가 없다. 의사 개인을 믿는 게 아니다. 독일인은 시스템을 믿는다.”
베를린=이영미 기자
자문해주신 분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임준 가천의대 교수 ▲이정우 인제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독일대사관 선남국 참사관·이정호 서기관 ▲독일의사협회 도멘 포드먼 정책보좌관 ▲데카(DK) 안트예 발트허 건강정책 담당관 ▲베를린응급병원 레온하르트 부르흐 과장·안겔라 키예프스키 홍보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