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웅 목사의 시편] 사랑은 시소게임

입력 2013-03-24 16:54


사랑은 시소게임이다. 사랑을 할 때 한쪽이 희생의 쓴잔을 받으면 다른 쪽은 행복의 단잔을 들게 된다는 뜻이다. 물론 항상 이런 식은 아니다. ‘사랑의 대상’이 변수가 된다. 즉 사랑의 대상에 따라 시소게임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만약 사랑의 대상이 아무 부족함 없는 존재라면 반드시 희생이 필요한 건 아니다. 그러나 만약 사랑의 대상이 부족해서 ‘무능하고 의존적 존재’라면 이때는 반드시 시소게임이 될 수밖에 없다.

쉬운 예로 아기를 보라. 아기는 무능하고 절대 의존적 존재다. 부모는 재미없어도 시간을 투자해서 동화책을 읽어주어야만 아기의 지성이 자란다. 옷을 입히고 목욕을 시키고 밥을 먹여야 하는데, 그것은 부모의 시간과 노동력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아기 옆에서 하루 종일 보내면 아기는 좋지만 그만큼 엄마는 힘들어서 때로 녹초가 된다. 부모가 만약 이런 희생을 안 하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성장은 없다.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면 그는 성장해도 유치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성인아이’가 된다. 그 고통은 아이의 몫이다. 부모가 쏟아붓지 않은 만큼 아이가 고통을 당하게 된다. 결국 둘 중 하나다. 부모가 희생하든지 자녀가 희생하든지! 부모도 희생하지 않고, 자녀도 희생하지 않는 것, 그런 것은 없다. 부모가 희생하면 아기는 희생을 피하고, 아기가 희생하면 부모가 희생을 면한다. 시소게임이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시소게임을 절대로 면할 수가 없다. 생각해 보라. 인간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가? 아기처럼 전적으로 무능한 의존적 존재다. 하나님이 없으면 자기가 누군지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을 일분일초도 연장시킬 수 없는 존재다. 뿐만 아니라 악하다. 무능한 아기는 그나마 예쁘기라도 하지, 인간은 예쁜 구석이 없다. 악하고 잔인하고 야비하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존재라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이런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 시소게임이 될 수밖에! 십자가 밑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했던 말은 진리였다. ‘저가 남은 구원하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맞다. 시소게임의 원리 때문에 자신을 구원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만약 자기를 구원했다면 고통은 인간들의 몫이어야 한다.

호머의 ‘일리아드’에 보면 아가멤논이 친딸을 희생시켜 바다의 폭풍우를 잠재운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은 기독교의 십자가를 이런 차원으로 쳐다본다. 마치 피에 굶주린 성마른 신으로 본다. 그러면서 핏대를 높이고 항의한다. 정말 사랑의 신이라면 왜 그냥 덮어주고 용서하지 않는가? 설명하자면 사랑의 대상을 잘못 고르신 것이 이유라면 이유다. 우리 같은 죄인을 사랑하지만 않았어도 하나님은 그런 오해와 고생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고난 주간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가슴에 아려온다.

<서울 내수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