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 유대인 학자 보야린 교수
입력 2013-03-22 17:27
작년 6월 초 나는 워싱턴의 가톨릭 대학(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에서 열린 학술대회에 참여해 논문을 발표했다. 이 학술대회에 기조 발표자로 초청받은 학자는 캘리포니아 대학의 다니엘 보야린(Daniel Boyarin)이란 유대인 학자였다.
음식과 신앙의 관계
보야린 교수는 유대인이지만 공관복음 연구로 널려 알려진 학자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며느리가 한국인이었다. 유대인 시아버지인 그는 자신의 며느리를 자랑스러워했다. 며느리는 본래 기독교인이었지만 결혼 후 유대인으로 개종했다. 며느리는 김치를 잘 담그고 자신도 김치를 즐겨 먹는다고 했다. 하지만 며느리는 레위기 11장의 음식 조항을 준수해 김치에 젓갈 종류는 절대 넣지 않는다. 고집이 세지만 확실한 자기주장 때문에 오히려 그는 며느리가 사랑스럽다고 했다. 유대인이라고 하여 다 레위기의 정결례 조항을 지키는 것 같지는 않다고 내가 말했더니 보야린 교수는 그런 유대인들이 분명 있다면서 그들은 ‘(유대교적) 영성이 없는 자들’이라고 딱 잘라 대답했다.
우리는 음식과 신앙을 별 관계없는 것으로 여기는 기독교적 토양 속에 살고 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된다는 정도다(딤전 4:4). 반면 유대교는 음식에 대해 아주 민감한 종교다. 레위기 11장에는 먹어도 되는 음식과 먹지 말아야 하는 부정한 음식의 종류가 상세하게 나열돼 있다.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이라….
음식으로 몸과 영혼이 더렵혀진다는 생각은 우리에겐 낯설지만 고대 이스라엘 종교에는 아주 소중한 가르침이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선택받은 백성도 거룩해야 하기 때문에 이것저것 함부로 먹어 몸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레 11:45∼47).
유대교의 율법은 역사 속에서 계속 발전해 왔고 그 중심에는 유대교 학자들이 있었다. 보야린 교수 같은 저명한 학자가 유대 전통에 충실한 것은 유대 학자들이 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율법을 지키고 발전시켜 온 그들 자신의 역사를 반영한다.
식사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행위다. 따라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식탁의 음식은 엄격한 규정에 따라 준비되어야 했다. 가축을 도살하는 칼은 날카로워야 하고 고기는 피가 남지 않도록 물속에서 30분을 담그고 소금에 한 시간 정도 절여야 한다. 달걀은 둥글고 타원형으로 가지런한 모양이어야 하고 피가 묻어 있으면 안 된다. 새끼를 어미젖에 삶지 말아야 한다는 규정(출 23:19)은 고기와 유제품을 함께 먹는 것을 금하는 전통으로 발전했다. 이 때문에 고기를 다루는 칼이며 도마가 별도로 있어야 하고, 유제품을 다루는 주방기구도 따로 있어야 한다.
1∼2세기 유대인의 반란 이후 유대교는 지배자에 대한 무력항쟁 노선을 포기하고 학자들 중심으로 신앙과 공동체, 학문을 거의 하나로 결합시켜 갔다. 유대 격언에는 ‘재물을 팔아 책을 구입하라’는 말도 있다. 천국은 거대한 도서관이며 그 도서관의 사서는 메타트론이란 이름의 천사장(天使長)이라는 애서(愛書) 전통도 유대교에만 있는 것이다. 학문을 중시하는 유대교의 성향을 대변해 준다.
나라도 없고 자신들을 지켜줄 군대도 없는 민족이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에서 돋보일 수 있는 방법으로는 의술이 단연 으뜸이었다. 그래서 중세 유대교 학자들은 동시에 의사이기도 했다. 유대교의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불리는 마이모니데스는 유대 학자이며 공동체의 지도자인 동시에 이슬람 술탄의 주치의이기도 했다. 이 위대한 학자는 정신병까지도 치료했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갈렌(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의사)의 약은 육체만을 위한 것이나 마이모니데스의 약은 육체와 영혼 모두를 치료한다’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유대 전통과 비교하면 학문을 경시했던 사막 기독교의 전통은 얄팍한 느낌도 없지 않다. 물론 비잔틴 수도원과 서방 수도원은 학문과 신앙의 요람이었다. 다행히도 안토니우스의 이런 말이 전해 내려오는 것에서 위안을 받을 수 있겠다. “나는 몸이 타고난 본능적인 움직임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영혼의 동의 없이는 작용하지 않는다. 이런 움직임은 단지 몸속에 있으되 동요가 없는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움직임도 있는데 음식과 음료를 통해 영양을 섭취하고 몸을 데우는 것으로부터 온다. 이것을 통해 뜨거워진 피가 몸을 자극해 움직이도록 한다. 이 때문에 사도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라’(엡 5:18)고 했고, 주님께서는 복음서에서 제자들에게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함과 술 취함으로 마음이 둔하여지지 않도록 하라’(눅 21:34)고 권면하셨다.
몸의 움직임 세 가지
그런데 또 다른 움직임도 있는데 마귀들의 간교와 시기로부터 생기는 것으로 마귀와 싸우는 자들에게 고유한 것이다. 이렇게 세 가지 몸의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두어야 한다. 첫째는 본성적인 것이요, 다른 것은 음식을 분별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이요, 세 번째는 마귀로부터 오는 것이다.”
본능적 움직임이야 어찌하겠는가. 하지만 음식을 분별하지 못해 몸을 동요하게 한다면 어리석은 것이다. 마귀로부터 오는 동요를 알아 영적인 싸움에서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다면 참된 기독교인일 것이다.
<한영신학대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