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이광형] 예술의전당 사장의 역할

입력 2013-03-22 17:33


1970년대부터 국립극단에서 활동했던 한 원로배우의 회고. “역대 대통령들이 가끔 공연을 보러 오셨지요. 하지만 끝까지 관람한 대통령은 거의 없습니다. 2막 가운데 1막만 보고 휴식시간을 이용해 스태프 및 출연진과 기념사진을 찍고 돌아가거나 아예 막이 오르기도 전에 금일봉만 내놓고 자리를 뜨는 경우도 많았어요.”

고희를 넘긴 이 원로배우는 1990년대 한 대통령의 공연 관람 때 벌어진 해프닝을 잊지 못한다. 대통령은 1막이 끝난 후 단원들과 악수를 나눈 뒤 극장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당시 한 원로단원이 무릎을 꿇고 대통령에게 눈물로 하소연했다. “저희들이 땀 흘려 올린 무대를 끝까지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지만 대통령은 응답이 없었다.

그동안 국립극장이나 예술의전당을 찾아 공연을 끝까지 관람한 대통령은 보기 드물다. 그것도 정부 차원에서 마련한 신년음악회 등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없는 실정이다. 영부인도 마찬가지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공식 행사 차원에서가 아니라 정말 보고 싶은 공연이 있어서 극장을 찾았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대통령이나 영부인이 공연장을 찾으면 사실 여러 사람이 피곤해진다. 공연장에는 며칠 전부터 안전점검이 이뤄지고 공연 당일에는 주변에 엄격한 경호가 실시된다. 대통령 전용석이 따로 있기는 하지만 객석도 웅성거리게 마련이다. 대통령이 움직일 때마다 경호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일반 관객들도 “VIP가 왔나?”라고 짐작하게 된다.

국·공립 공연장의 수장들은 임기 중에 대통령 내외를 초청해 공연을 보게 하면서 눈도장도 찍고 싶겠지만 현실적으로 쉽지는 않다. 외국의 대통령은 비서 한두 명만 대동한 채 편안한 복장으로 공연이나 전시를 관람하는 사례를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대통령은 한가하게 그럴 시간이 없다. 정국 현안이 산더미 같고 북한 도발도 심상찮은데 예술 관람이라니?

모철민 전 사장이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으로 자리를 옮겨 공석이 된 예술의전당 신임 사장으로 고학찬 윤당아트홀 관장이 임명됐다. 임기는 3년. 문화예술계에서는 그의 임명을 두고 말들이 많다. 별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데다 소극장 관장 경력으로 공연과 전시 등 복합문화공간인 예술의전당을 잘 운영할지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제주 출신인 고 사장은 극단 ‘신협’에서 활동했으며 TBC PD, 제일기획 Q채널 국장, 삼성영상사업단 방송본부 국장 등을 지냈다. 박근혜 대통령과는 2007년 인연을 맺은 후 문화예술분야에서 여러 조언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박 대통령의 싱크탱크 역할을 했던 국가미래연구원에서 문화예술분야 간사를 맡았고, 이번 대선 때 국민행복추진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특히 그가 관장으로 있던 윤당아트홀에서는 3월 1일부터 5월 31일까지 고(故) 육영수 여사의 삶을 조명한 뮤지컬 ‘퍼스트레이디’가 공연돼 논란을 빚었다. 공연계 안팎의 시선이 곱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취임 이후의 역할이다. 대통령과 친밀하다고 해서 ‘용비어천가’ 스타일 공연이나 올린다면 곤란하다.

모두가 공감하는 무대를 올리는 것은 물론이고 예술가들이 처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해 잘못된 점이 있으면 바로잡아야 한다. ‘문화융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장을 자주 찾아야 한다고 대통령에게 직언도 필요하다. 대통령이 언제든지 공연을 보고 예술인들과 격의 없이 얘기를 나누도록 유도한다면 예술의전당 책임자로서 최상의 역할이 아닐까.

이광형 문화생활부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