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다녀가는 바람 아닌 것이 있으랴… 한승원 다섯번째 시집 ‘사랑하는 나그네 당신’

입력 2013-03-21 17:31


“바다는 죽음 없는 신의 얼굴, 영원한 시간의 몸짓이다. 죽음 있는 내가 죽음 없는 바다를 보듬고 살면서 쓴 다섯 번째의 시집이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한승원(74·사진)이 신작 시집 ‘사랑하는 나그네 당신’(서정시학)에 붙인 서문이다. 시집은 그가 살고 있는 전남 장흥 앞바다의 풍광과 인생 황혼기를 맞은 시인의 심상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묵직한 감동을 전한다.

“이 세상 다녀가는 바람 아닌 것이 있으랴// 소주 몇 잔으로 벌겋게 취한 노을이/ 사라지고 수묵 색깔의 땅거미가/ 내리는데 먼 바다에 물새처럼 동그마니 앉은 무인도에 번하게/ 치자 빛깔의 까치노을이 뜬다, 나도 사라질 때 저 빛깔이고 싶다// (중략)// 그만 멈추어 서려는 증후,/ 하늘의 계시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사랑하는/ 나그네 당신은 이제/ 어디론가 떠나갈/ 유서를 쓴다”(‘서시’ 부분)

이 시에 빗대자면 시로 쓴 유서가 이번 시집일 수 있겠다. 하지만 어느 해 봄날 홍매화 향기를 맡으려다 가시에 콧등을 찔리고 바라본 구름에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는 장면에서는 유서가 이토록 아름다워도 되는가 라고 반문하게 된다.

“여섯 살 되던 해 봄/ 퉁퉁퉁 내리막길을 달리다가 발 헛디디고 앞으로 엎어져/ 무릎을 돌부리에 찧었는데/ (중략)/ 다시 그 자리에서 넘어지지 않고 금방 떡을 얻어먹게 된단다, 하고 달래는/ 한쪽 눈이 애꾸인 당숙의 말을 따라/ 땅바닥에 침을 뱉고 쳐다본/ 아, 그 하늘 그 흰 구름이다”(‘홍매화’ 부분)

시인은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땅과 하늘 사이에 가득한 시적 예감을 그만 둘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꼭두새벽에 거실로 들어온 꽃뱀을 집게로 집어 풀밭에 풀어주면서 이런 불가사의한 사념에 빠지기도 하는 것이다. “50년 전 내가 한 초등학교에서 담임한 심장 판막증을 앓던 5학년의 열여섯 살의 얼굴 창백한 소녀의 넋이 찾아왔을까 (중략) 그 소녀가 죽어가면서 보낸 편지에는 그녀의 나에 대한 슬픈 첫 사랑의 사연이 초조처럼 묻어 있었다 나는 도리질을 하며 아니다 아니다 했다”(‘화사’ 부분)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