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흔들어 빙그레 웃게하는 순간들”… 신경숙 소설집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출간
입력 2013-03-21 17:30
“꽤 오래 전 장편 작업을 계속하던 어느 날 산보를 하다가 달을 한참 쳐다보게 되었지요. 달과 내 시선이 만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날따라 느낌이 아주 강렬했지요. 달이라는 것이 신화적으로 보면 모성을 상징한다지요. 내 얘기를 잘 들어줄 것도 같고…. 그때 서로 반짝거리며 서로를 이완시켜주면서 함박 웃게 되는 짧은 이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짧은 소설집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문학동네)를 펴낸 소설가 신경숙(50)씨를 21일 서울 동교동의 햇살 좋은 카페에서 만났다. 신씨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국제문학페스티벌에 참가하고 19일 밤 귀국했다. 그의 소설집엔 팍팍한 우리네 삶을 위무하면서 은근슬쩍 유머의 한 자락을 깔고 있는 스물여섯 편의 짧은 이야기가 실렸다.
-이런 종류의 글을 쓰게 된 계기는.
“2007년엔가 한 잡지와 인터뷰하다가 서평지에 자유롭고 짧은 형식의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2년쯤 연재한 적이 있었어요. 매달 한 편씩 원고를 넘겼는데 쓰는 시간 자체가 즐거웠지요. 글로 표현해 놓지 않으면 쓱 지나가고 말 것 같은 어떤 순간들은 삶의 의미를 바꿔주기도 하고 긴장감도 풀어주는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어떤 긴장감인가.
“작가이다 보니 늘 관찰하고 꽉 조여져 있는 긴장된 시간들을 살 수밖에 없지요. 그동안 내 소설을 읽은 독자들 가운데 여운이 며칠씩 가라앉지 않는다며 좀 즐거운 이야기를 쓸 계획이 없냐고 묻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미안하기도 하고 속도 상하기도 했지요. 내 글쓰기 방향을 전면적으로 그쪽으로 옮겨갈 수는 없겠지만 숨통을 틔워주고 긴장을 이완시키는 이야기를 써보았지요.”
예컨대 수록작 ‘겨울나기’는 고양이와 까치 사이에 벌어진 사료 쟁탈전에 대해 들려준다. 우연히 집에 들어온 길고양이를 위해 사료를 사서 마당 한 귀퉁이의 접시에 담아놨는데 처음엔 고양이들이 와서 먹더니 어느 사이에 까치떼가 몰려와 고양이는 얼씬도 못하고 급기야 다른 무리의 까치들과 싸움을 하게 된 사연을 들려주며 이렇게 매듭짓는다.
“달아! 대체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혹시 알고 있니? 난 다음 날 세 개의 접시를 조용히 집 안으로 들여놨어. 이 겨울을 나는 방법이 그들 나름대로 있었을 거야. 그들의 세계에 내가 개입하면서 생긴 이 싸움을 그치게 하는 길은 세 개의 접시를 들여놓는 일밖에는 없더군. 그런데 달아, 왜 이렇게 막막한 거지?”
딸네 집에 앉은뱅이 나비장을 갖다 주려고 보자기로 싸서 지하철 계단을 내려온 할머니가 다른 할머니와 나눈 대화를 들려주는 ‘풍경’은 코끝을 찡하게 한다. “가져가라 하든지 택시를 타든지 해얄 거 아니우!” “가져가라 하기가 미안하구, 폐 끼치는 거 같구. 택시비가 많이 나와서” “미안하기는 뭐가 미안하우. 난 할매 같은 사람 보믄 아주 화가 나. 아주 속이 터진다구. 왜 그렇게 사슈. 제 몸 하나도 주체를 못하면서. 어느 역까지 가는 거유?” “당산역” “딸이 당산역으로 마중 나온다 했소?” “아니요.” “당산역에서 내려서 이 짐을 끌고 어쩔라구 그러시우?” “사람은 다 살게 되어 있으니… 댁에 보고 이거 들어다달라고 안 할 테니 걱정 마시우.”
-수록된 작품들의 길이가 짧다보니 콩트인지, 소설인지 헷갈릴 수도 있겠는데.
“한국 단편소설의 밀도는 해외 장편의 밀도에 육박할 정도로 세계에서 드문 밀도를 자랑하지요. 단편을 그렇게 쓰는 작가는 우리 작가뿐일 겁니다. 미국 단편소설의 거장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은 그야말로 ‘단편’, 즉 ‘숏 스토리(shot story)’이잖아요. 이번 소설은 밀도로 승부보자는 것도 아니고 ‘숏 스토리’ 그 자체로 분류되길 빌어요.”
-빙그레 웃게 되는 대목들이 많은데 그건 어떤 경우의 웃음인가.
“순간순간 재발견되는, ‘그래서 인간이야’ 하는 말이, 혹은 ‘내가 인간이어서 좋다’는 말이 저절로 나올 때, 그때가 빙그레 웃게 되는 경우가 아닐까요.”
-다음 장편은 어떤 작품인지.
“두 개의 이야기를 놓고 갈등하고 있지요. 하나는 옴니버스 형식으로 네 개의 삶을 써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10년 전부터 구상하고 있는 앞을 못 보게 된 사람의 이야기인데 둘 중 하나를 붙들고 열심히 써볼 작정입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