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노석철] 무너진 경찰청장 임기제
입력 2013-03-20 19:18 수정 2013-03-21 00:35
경찰청장 시절 A씨는 사석에서 인사 얘기가 나오자 버럭 화를 냈다.
“어떤 X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밀어내려고 음해하는 자가 있는데 가만두지 않겠다. 지가 나를 밀어내서 빨리 경찰청장 되면 뭘 어쩌겠다고 그래. 누구인지 알고 있는데 그러면 안 된다.”
A씨가 핏대를 세우며 비난했던 대상인 B씨는 얼마 후 경찰청장이 됐다. B씨는 경찰청장에서 퇴임한 뒤 이렇게 털어놨다.
“그분과는 경찰 고위간부가 되기 전까지는 아주 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그가 경찰청장이 되고 내가 그의 뒤를 추격하는 모양새가 되니까 나를 의심하기 시작하더라. 그래서 나는 따로 모임을 갖는 것도 조심스러워했다. 그런데도 내가 자기 자리를 뺏으려 한다고 오해를 해 답답했다.” 두 사람은 그 후에도 화해를 못한 듯했다. 특정될 수 있어 시점은 밝히지 않겠다.
경찰청장 인사 때 암투 난무
두 사람의 암투를 예로 들었지만 매번 경찰청장 인사 때마다 벌어지는 진풍경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강덕아!’라고 부를 정도로 아꼈다던 이강덕 전 청장 때도 그랬다. 그가 경기경찰청장을 거쳐 서울경찰청장으로 옮기자 경찰청장 후보 1순위로 급부상했다. 당연히 경찰청장보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쏠렸다. 조직의 기강이 흔들리는 건 당연했다. 그는 경기청장 시절 “나에게 쏠리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사람도 거의 만나지 않는다”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영포회 의혹을 넘지 못해 해양경찰청장을 끝으로 경찰생활을 마감했다.
경찰청장은 10만여 경찰관을 통솔하는 치안 최고책임자다. 자리를 둘러싼 잦은 암투로 경찰청장의 지휘력이 흔들리면 치안공백이 생기고, 그 피해는 국민들에게 돌아간다. 그래서 2004년부터 경찰청장 임기제가 도입됐다. 그러나 임기제 이후 경찰청장 7명 중 2년 임기를 채운 사람은 이택순 전 청장뿐이다. 나머지는 대부분 각종 치안사고의 책임을 지거나 본인의 처신 문제 등으로 그만뒀다. 지난해 5월 임명된 김기용 경찰청장은 1년도 못 채우고 떠나야 할 처지다.
경찰 내부에서는 1순위 후보였던 이강덕 전 청장이 물을 먹으면서 ‘어부지리’로 그가 임명됐기 때문에 교체가 불가피한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청와대에선 교체 이유를 전혀 설명하지 않고 있다. 다만 그가 임기도중 하차하면서 경찰 내 권력 암투가 더욱 고착화될 것이란 걱정이 앞선다. 열심히 일해서 인정받기보다는 권력 주변에 줄을 대는 게 더 낫다는 인식이 굳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외풍에 조직 곪는다
게다가 경찰청장 후보 1순위로 꼽히는 서울경찰청장이 3번 연속 경찰청장에 오르지 못한 것도 경찰 조직안정에는 부정적이다. 최근 이성규 이강덕 전 청장과 김용판 현 청장이 경찰청장 문턱에서 좌절됐다. 이는 업무능력보다는 친한 사람을 ‘차기 경찰청장’ 자리에 앉히려는 권력 주변의 입김이 더 크게 작용한 탓으로 해석된다.
이성규 전 청장은 다르지만 이강덕 전 청장은 MB가 아끼는 사람이고, 김용판 청장은 대구 출신에 영남대를 나와 박근혜 대통령과 인연이 닿는 사람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한쪽은 영포회란 부담에, 다른 한쪽은 정치편향 수사 의혹 때문에 경찰 최고 위치에 오르는 데 실패했다.
서울청의 한 간부는 “3번 연속 서울청장이 탈락한 건 극히 이례적이고, 또 물먹은 이유도 상당히 정치적인 경우가 많아 더 우려된다”고 말했다. 조직의 2인자가 정치적 논란에 자꾸 휘말려 탈락하면서 조직 전체 인사가 불안해지고 기강이 흔들린다는 것이다. 청와대가 업무능력이나 조직 내 신망 등을 고려하지 않고 엉뚱한 사람을 자꾸 요직에 앉히면 그 조직은 속으로 곪는다. 이는 최고권력자인 대통령에게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
노석철 사회부장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