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서 못 배운 땀의 가치, 흙에서 배우고 있어요”
입력 2013-03-20 18:30
명문대생들의 영농조합 ‘레알텃밭’ 가보니
“가위, 바위, 보! 원하는 땅에 삽을 꽂자!”
서울 불광동 한 주택가 골목 끝에 위치한 ‘갈현농장’에 16일 오전 20명의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스스로를 ‘젊은 농부’라고 소개한 이들은 밭을 갈기 전 삽을 들고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농부’ 하면 연상되는 허드렛바지(속칭 몸뻬바지), 장화, 밀짚모자 대신 운동화에 핫팬츠, 형광색 티셔츠, 청바지 차림이었다. ‘가위, 바위, 보’에서 이긴 3조가 먼저 좋은 땅을 골라 삽을 꽂았다.
올 들어 첫 번째 작업이다. 겨우내 굳어 있던 땅을 갈아엎어 흙을 부드럽게 해 주는 것으로 일을 시작했다. 삽과 호미로 흙을 갈아엎는 동안 다소 쌀쌀한 날씨였는데도 농부들 이마엔 땀이 맺혔다. 밭을 간 뒤 각자 집에서 가져온 숯불재나 달걀껍질을 모아 만든 친환경 석회를 뿌렸다. 이들은 밭을 살피며 잔디와 잡초를 일일이 손으로 뜯어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는 곧 한 차례 비가 올 것이라는 일기예보 소식에 이랑을 만들어 흙이 떠내려가지 않게 했다.
‘씨앗들 텃밭학교’라는 영농조합의 ‘레알텃밭’에 참여하고 있는 청년 농부들은 말 그대로 신세대 농부다. 젊은세대들이 쓰는 ‘리얼(real)’의 속어인 ‘레알’에 ‘텃밭’을 붙여 ‘진짜 텃밭’이라는 뜻을 담았다. 지난해부터 이들은 서울시를 통해 ‘텃밭보급소’에서 330㎡(약 100평)의 땅을 분양받아 공동경작으로 땅을 일구고 있다. 지난 가을에는 직접 수확한 김장 재료들로 김치를 담가 독거노인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젊은 농부들의 모임은 2010년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학생들로 구성된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이라는 대학 동아리에서 출발했다. 학내 버려진 땅에 텃밭을 일구며 농사의 즐거움을 배워가던 이들은 캠퍼스를 벗어나 도심 속 작은 텃밭을 가꾸기 위해 올해 협동조합을 조직했다.
그 사이 구성원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하면서 모임의 주체는 자연스럽게 ‘청년’으로 바뀌었다. 각자 회사원으로, 학생으로 생활하면서 주말이면 어김없이 텃밭으로 모여든다. 학창시절 공부벌레로 통했던 이들에게 농사의 매력을 묻자 “농사는 정직하다”고 입을 모았다. 서울대 일반대학원에서 미학을 전공하는 조합장 황윤지(27·여)씨는 20일 “학교에 다니며 육체노동을 해볼 일이 없었는데,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노동의 가치를 배우고 있다”며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들은 어른들이 일러주는 농사 매뉴얼은 따르지 않는다. 조합 내 관련 전공생도 없다. 공학, 경제학, 언론학을 전공한 이들이 모여 실험적으로 밭을 일구는 것이다. 경작지를 구분한 뒤 거름, 물 등 조건을 달리해 실험적으로 작물의 생육을 비교해보기도 한다. 공부벌레들답게 청년 농부들은 정기적으로 농사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도 갖는다. 최근 스터디 모임에선 토양을 분석하고 기후에 대해 공부했다.
처음으로 조합에 가입해 텃밭에 나온 최영주(23·여)씨는 취업준비생이다. 최씨는 화려한 스펙 대신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선택했다. 최씨는 “모종을 심고 바로 수확하면 되는 단순한 일인 줄 알았는데 심기 전 준비 작업이 힘든 줄 몰랐다”며 “농사 준비 과정이 힘들지만 힘을 쏟은 만큼 수확물을 얻는 것처럼 취업도 차근차근 준비해서 좋은 결과를 내고 싶다”고 말했다.
글·사진=김유나 기자 spr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