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이면 박사” 세속적 잣대에 빈곤해지는 영성
“동기 목사들 중 절반 이상이 박사학위 과정에 있거나 준비 중이에요. 저도 서둘러야 할 시기인데, 시간을 많이 뺏기고 학비도 비싸서 엄두가 안 나요. 그런데 박사학위 없이는 (담임목사) 이력서를 낼 수조차 없는 분위기라서….”
서울 강남의 한 대형교회에서 6년차 부교역자로 사역 중인 황모(44) 목사. 목회학이나 신학 박사학위를 하나쯤 따야 할지 말지를 고민한 지가 벌써 2년이 넘었다.
황 목사 같은 40∼50대 부목사들이 털어놓은 ‘박사’에 얽힌 비화 몇 가지. 일정 규모 이상의 중·대형 교회에서 목회자를 청빙할 때 1차 서류 전형에서 합격자를 가르는 잣대는 십중팔구 박사학위 유무다. 기업체가 신규인력을 채용할 때 ‘토익 800점 이상’ 등의 방식으로 자격을 제한하는 것과 흡사하다. 국내 최대 신학교육기관으로 꼽히는 A신학대는 지난해 초 시간강사(신약학) 1명을 뽑는 공고를 냈다. 신청을 마감하고 보니 해외파 박사 출신만 무려 16명이었다. ‘선목후학(先牧後學)’이란 말도 있다. 철학(Ph.D) 및 신학(Th.D) 박사 같은 취득이 어려운 학문의 박사보다 비교적 수월한 목회학박사(D.Min)에 먼저 도전하라는 뜻이다.
한국교회에 박사가 넘쳐나는 이유는 뭘까. 목회를 하는데 박사학위는 꼭 필요한 걸까. 요즘 한국 교회의 목회자 ‘청빙(請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정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서울 목동의 M교회. 지난해 초 담임목사의 갑작스런 사임으로 후임자 모집에 들어가 서류·면접을 거쳐 후보 6명을 추려냈다. 이들은 차례로 매주 오후 및 수요 예배 설교자로 나서 성도들의 ‘설교 평가’를 받았다. 교회 측은 성도들의 의견과 담임목사 청빙위원회 심사를 거쳐 담임목사를 결정했다.
불과 십수년 전만 해도 목회자 청빙 풍경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교회는 물론 소속 노회의 원로급 목사와 장로들이 직접 수소문하며 발품을 팔아 후임 목회자를 구하는 데 공을 들였다. 그 기간 교회 성도들은 영성과 인품을 갖춘 목회자를 세워달라고 함께 기도하며 준비했다. 예전의 청빙이 글자 그대로 ‘부탁하여 모셔오는’ 것이었다면 오늘날 청빙은 사람을 골라서 쓰는 ‘채용’처럼 돼 버렸다.
부교역자를 거쳐 한 장로 교단의 총회 본부에서 사역중인 김모(46) 목사는 “청빙의 본래 의미가 퇴색한 이유는 목회자가 양산을 넘어 과잉에 도달했다는 현실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면서 “담임목사 지원자가 넘치다보니 박사학위 같은 외형의 스펙을 변별 기준으로 삼는 세속적 관행이 교회에도 자리잡은 것 같다”고 진단했다. 목회자 청빙 때 잣대가 되는 스펙에는 박사학위뿐 아니라 해외목회 경력도 종종 포함된다. 이 같은 경력이 꼭 필요한 교회도 있지만 실제로는 대외 과시용에 머무는 경우가 더 많다.
‘스펙 중시’ 현상의 배경에는 우리사회에 고질적인 학력제일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박사 출신과 비(非)박사 출신 후보가 있을 경우, ‘이왕이면 박사 출신 목사가 낫지’라는 선입견이 작용한다. 몇몇 신학교육기관의 비뚤어진 학위 장사 세태와 일부 목회자들의 과시성 명예 욕구도 무시할 수 없다. 이 같은 요인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박사학위 양산에 그치지 않고 논문 부실이나 표절, 대필 등과 같은 부작용으로 이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이런 관행이 바람직한 목회자의 상을 왜곡하고 변질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목회자는 학자가 아니잖아요. 얼마나 배운 사람인가보다는 ‘예수님을 닮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 구도자인지’가 더 중요한 덕목 아닌가요” 김모(52·C교단 본부) 목사는 이렇게 일갈했지만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미련은 접지 못한 듯했다. “물론 기회만 되면 (박사학위) 하나쯤은 받고 싶어요, 솔직히….”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긴급 진단-사랑의교회 사태로 본 ‘학위 거품 이대로 좋은가’] (중) 한국교회 관행이 스펙쌓기 유도
입력 2013-03-20 17:31 수정 2013-03-20 1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