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멈춘 가덕도의 봄 더욱 서러워라… 일본군 요새 사령부 흔적 어린 부산 외양포마을

입력 2013-03-20 17:14 수정 2013-03-20 17:53


거가대교 완공으로 자동차 접근이 가능해진 가덕도는 사하구 다대포와 거제도 사이에 위치한 섬으로 군사적 요충지이다. 임진왜란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가덕도는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러시아 발트함대를 견제하고 연합군 상륙을 막기 위해 외양포(外洋浦)에 일본군 제4사단 휘하의 ‘진해만 요새사령부’가 주둔했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가덕도 남서쪽에 위치한 외양포로 가는 길은 마을의 복잡한 내력을 상징하듯 구절양장 고갯길의 연속이다. 경사가 급한 길을 오르내리고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린 산모롱이를 몇 번 돌면 산행객들로 북적거리는 대항마을이 나온다. 대항마을 동쪽 해변에 위치한 새바지는 바다낚시꾼들을 실어 나르는 간이역. 가덕도 주변 갯바위까지 강태공을 실어 나르는 보트들의 엔진소리가 하루 종일 끊이지 않는다.

새바지는 동쪽에 위치해 샛바람을 많이 받는 곳이라는 뜻. 새바지 마을에도 일제강점기 시절의 아픈 상처가 짙게 남아 있다. 1904년부터 1945년까지 외양포에 주둔했던 일본군이 강원도 탄광의 근로자들을 강제 징용해 뚫은 벙커가 검은 입을 벌린 채 부산 앞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연합군 상륙을 막을 목적으로 만든 벙커는 입구가 3개지만 안은 미로처럼 연결돼 있다. 지금은 주민들이 그물 등 어구를 보관하는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새바지 해안에는 일본군이 만든 수많은 벙커가 존재하지만 바다에서 보이는 벙커는 1970년 다대포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후 군에서 폭파해 철거했다고 한다.

외양포는 대항마을에서 자동차 한 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산길을 지그재그로 1㎞ 정도 달려야 나온다. 20여 채의 건물에 30여 가구가 사는 외양포는 겉모습은 여느 갯마을과 다를 바가 없다. 밭고랑만큼이나 주름이 짙은 노인들이 호미로 밭을 매고 외지에서 온 등산복 차림의 아낙들은 삼삼오오 쪼그리고 앉아 쑥을 캐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은 풍경화처럼 평화롭다.

그러나 자세히 뜯어보면 파란색과 초록색 기와지붕이 인상적인 외양포의 집들은 기름 먹인 나무로 건축한 일본식 목조건물이다. 바람 불면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 쇠락한 건물들은 모두 일제강점기 시절의 요새 사령부로 헌병대 막사, 무기창고, 장교 사택, 사병 내무반 등을 대충 수리한 것이다. 어떤 집은 사병 내무반으로 건물은 한 동이지만 지붕의 색깔만 달리해 세대를 나누고 있다.

평화롭던 갯마을이 일본군의 요새사령부로 전락한 시기는 러일전쟁이 발발한 1904년. 일본군은 러시아 발트함대와의 격전에 대비해 외양포에 포대사령부를 건설하기로 하고 주민들에게 마을을 떠날 것을 명령한다. 당시 외양포는 대항마을보다 큰 마을로 양천 허씨 집성촌이었다.

일제는 주민들이 떠나기를 거부하자 집과 세간을 불태우고 총과 칼로 위협해 강제 이주시킨 후 1905년 요새사령부를 완공했다. 해방 후에는 인근 마을에 흩어져 살던 주민들이 군부대로부터 장기불하를 받아 살고 있지만 외양포가 군사시설보호구역인데다 국유지라 증개축은 엄두도 못낸 채 100년 전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외양포는 시간이 정지된 마을이다. 매화꽃과 동백꽃, 그리고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한 마을은 늙은이들만 남아 괴괴하다. 벌겋게 녹슨 함석집은 빈집인 듯 먼지가 쌓인 슬리퍼 한 짝만 남아있고, 대여섯 개나 되는 일본식 우물은 물이 마른 지 오래다. 하지만 붉은 벽돌로 지붕을 얹은 우물 중 하나는 지금도 주민들의 식수원 역할을 하고 있다.

일본군 요새사령부의 포진지는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산자락에 위치해 외부에서 쉽게 보이지 않는다, ‘사령부발상지지(司令部發祥之地)’라고 새긴 건립비가 서 있는 포진지는 18년 전 부산의 답사모임에 의해 처음으로 외부에 알려졌다. 발견될 당시 아치형의 콘크리트 탄약고와 병사들의 내무반 등은 칡넝쿨에 둘러싸인 데다 조그마한 언덕으로 보여 외부인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군은 이렇게 완벽한 포진지를 구축해 놓고 진해만으로 들어서는 러시아 함대를 향해 일제히 포격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일반 관광객들은 외양포에서 더 이상 남쪽으로 갈 수가 없다. 그러나 해병대와 해군의 사전허가를 받아 군부대를 통과하면 가덕도 최남단에 위치한 등대까지 여정을 연장할 수 있다. 연분홍 진달래가 갈색숲에서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한 산길을 한참 달리면 동두말(東頭末)의 깎아지른 벼랑 위에 서있는 104년 역사의 가덕도등대를 만난다.

가덕도등대가 첫 불을 밝힌 때는 1909년 12월 24일. 군사적으로 중요한 가덕수로의 입구에 위치한 가덕도등대는 동쪽으로는 사하구 다대포, 서남쪽은 거제도 동북바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부산항 신항과 접하고 있다.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출입구를 지키고 있는 옛 등대는 대한제국의 황실문양인 오얏꽃 문양이 조각돼 있고 내부에는 땔감으로 물을 데우던 목욕탕 등이 보존돼 있다.

2002년에 세운 새 등대는 높이가 40.5m로 국내에서 두 번째로 높다. 나선형 계단을 빙글빙글 돌아 전망대에 오르면 가덕도를 비롯해 다대포와 거제도, 그리고 거가대교의 웅장한 자태가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하지만 가덕도등대 전망대에서 만나는 장쾌한 풍경에도 불구하고 가덕도의 화려한 봄날이 홀로 바다를 지키는 등대지기처럼 쓸쓸해 보이는 까닭은 왜일까. 시계바늘조차 멈춘 외양포의 손바닥만한 텃밭에 쪼그려 앉아 마지막일지도 모를 봄을 심는 노파의 굵은 주름 때문이리라.

부산=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