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박강섭] 사람이 관광자원인 시대
입력 2013-03-20 19:11
섬진강변에 위치한 전남 광양 청매실농원의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했다. 해마다 이맘때면 청매실농원은 꽃과 향을 즐기는 상춘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한 달 남짓한 개화기에 청매실농원을 찾는 상춘객은 100만명 정도. 경제파급효과 같은 거창한 단어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기름값 등을 포함해 1인당 1만원만 소비한다고 가정해도 100억원이라는 엄청난 돈이 지역에 풀린다.
지역경제 기여는 이뿐만이 아니다. 백운산의 가파른 산기슭에 터를 잡은 섬진강변 사람들은 농사지을 땅 한 평 없어 가난을 대물림했다. 그러나 고소득 작물인 매화나무를 산자락과 강변에 심으면서 부농의 꿈을 이루기 시작했다. 심지어 강 건너 경남 하동까지 매실농사에 가세하면서 섬진강변은 남도 최고의 관광지로 변신했다.
이처럼 섬진강변을 남도관광 1번지로 만든 주역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아니라 올해 일흔한 살의 청매실농원 홍쌍리 매실명인이다. 스무 살에 광양으로 시집 온 그녀는 돌산의 밤나무를 베어내고 매화나무를 심었다. 그녀의 눈물과 땀을 먹고 자란 매화나무로 인해 청매실농원은 이제 어엿한 기업으로 성장했다.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 스타가 됐지만 그녀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농사꾼을 자처하며 직접 농사를 짓는다. 청매실농원을 찾는 관광객들이 정작 꽃구경보다 그녀와 말 한 번 나누고 손 한 번 잡아보기를 원하는 이유다.
아이돌 스타에 버금가는 인기 스타는 슬로시티로 유명한 전남 담양의 삼지내마을에도 있다. 정겨운 돌담길을 따라 실개천이 흐르는 500년 역사의 삼지내마을이 슬로시티로 지정된 것은 2007년. 담양군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마을을 관광자원으로 육성하기 위해 시설이 아닌 사람에 투자를 했다.
약초밥상을 잘 만드는 최금옥씨, 야생화로 효소를 만드는 임은실씨, 쌀엿 만드는 유영균씨 등 저마다의 특기를 가진 마을 노인 26명을 장아찌명인, 된장명인, 효소명인, 쌀엿명인 등으로 육성하자 마을은 이들을 만나보려는 관광객들로 문전성시의 호황을 누리고 있다.
잘나가던 관광한국이 갑자기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외래관광객 1000만명 돌파 축하파티를 한 게 엊그제 같은데 엔저 영향으로 일본인 관광객이 급격히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북한의 핵전쟁 위협으로 서구와 동남아 관광객들도 한국 여행을 꺼리고 있다.
국내 경제사정이 어려워지자 내국인 관광객들의 씀씀이도 줄어들었다. 박물관 등 혈세로 지은 지방의 관광시설물은 찾는 사람이 없어 개점휴업 상태인 곳이 나날이 늘고 있다. 그런데도 광양 청매실농원과 담양 삼지내마을처럼 사람이 관광자원인 곳은 연중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젠 관광도 자연이나 시설 못지않게 사람이 각광받는 시대로 변해가고 있다. 하잘 것 없어 보이는 농촌이지만 그곳에는 홍쌍리 매실명인처럼 휴먼스토리의 주인공들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고 사람들은 그들이 살아온 삶에 열광한다. 삼지내마을이 명인 육성에 필요한 노력의 몇 배를 투자해 마을박물관을 만들었다면 지금과 같은 명성을 누릴 수 있었을까? 그런데도 우리는 관광에서의 글로벌 경쟁력을 시설 위주의 하드웨어에서 찾고 있는 경우가 많다.
노인 한 명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진배없다는 말이 있다. 한 사람이 한평생 살아오면서 배우고 터득한 삶의 지혜와 경험은 보전하고 계승해야 할 인류의 문화유산이라는 뜻이다. 이제 그 삶의 지혜와 경험이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부상하고 있다. 사람이 관광자원인 세상은 100세 시대의 노인 일자리 창출과 강소(强小) 관광마을 육성과 연계돼 있다. 제2의 홍쌍리를 발굴하고 제3의 삼지내마을을 육성하는 일이 관광한국을 위한 정부와 지자체의 몫으로 대두되고 있다.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