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분석] 정권초 국정과제 속도전 vs 힘 빠지는 책임장관제
입력 2013-03-19 18:22
① 朴 대통령 ‘디테일 리더십’ 득실
박근혜 대통령은 18일 주재한 수석비서관회의 비공개 부분에서 13가지 주문을 8000자 분량으로 쏟아냈다. 대부분은 “민원카드를 작성해 끝까지 해결하라” “미래창조과학부 약칭을 만들어라” 등 세세한 지시로 채워졌다. 원칙과 함께 꼼꼼함을 정치적 자산으로 뒀던 박 대통령이 ‘디테일(Detail) 리더십’을 다시 선보인 셈이다.
박 대통령과 오랫동안 일을 해봤던 청와대 관계자는 19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박 대통령은 급박하다고 느낄 때마다 직접 나서서 꼼꼼히 챙기는 스타일”이라며 “촘촘한 주문을 받은 실무진은 확실한 동기를 부여받아 일에 속도를 내게 된다”고 말했다. 집권 초 국정이 표류한 현 상황을 대통령이 그만큼 위급하게 보고 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사안마다 정부 부처에서 검토할 만한 지시까지 내릴 경우 장관들의 재량권이 줄어 오히려 업무 추진력을 상실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초반에는 바짝 지시를 수행하지만 나중에는 대통령의 입만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박 대통령이 “공약 따로, 장관 어젠다 따로가 아니다”고 밝힌 대목은 ‘책임장관제 확립’ 공약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박 대통령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국정과제 토론회에서도 꼼꼼한 지시를 내리며 인수위 업무 진행 속도와 정부 업무보고 내용에 불만을 드러냈다. 결국 인수위가 발표한 국정과제는 대통령의 지시 및 공약을 정리한 수준에 그쳤다는 평가를 받았다. 인수위에 참여했던 인사는 “대통령이 중소기업의 ‘손톱 밑 가시’를 제거해야 된다고 말하자 정부가 가져온 보고서에는 곳곳에 ‘손톱 밑 가시’라는 구절이 들어갔을 뿐 참신한 내용이 없었다”고 소회했다. 21일부터 시작되는 부처 업무보고 때도 ‘국민행복’ ‘창조경제’ 등 어젠다와 함께 박 대통령이 내린 지시를 ‘이행하겠다’는 내용만 가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정권 초기에 아직 박 대통령의 국정철학이 제대로 공직사회에 전달되지 않아 불가피하게 말씀이 많아진 것”이라며 “국정 드라이브가 본격적으로 걸리면 실무는 부처와 장관에게 맡기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초반부터 박 대통령의 지시에 길들여진 정부가 한순간에 업무를 주도하는 체제로 변모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박 대통령의 ‘디테일 리더십’은 상명하달에 익숙해 가뜩이나 ‘영혼이 없다’는 비판을 받는 공직사회를 더욱 경직시킬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대통령이 ‘대북 인도적 지원을 재개하라’는 지시가 아닌 ‘쌀을 몇 t 보내라’는 식의 명령을 내린다면 공무원들은 지원 방안·시기를 연구하기보다 어떤 쌀을 보내야 되나만 붙잡고 있지 않겠느냐”며 “대통령은 그랜드한(큰 규모의) 설계만 해주고 실제 일하는 사람들은 느슨하게 풀어주는 게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새누리당 정책통인 한 의원은 “책임장관이라는 단어에는 정책이 잘못됐을 때 장관이 책임진다는 의미도 있다. 이런 식이라면 대통령에게 모든 책임의 화살이 쏠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유성열 기자 nukuv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