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애슐리 박 (4) 박사시험 탈락 좌절 속에 ‘첫 아이 임신’ 선물을
입력 2013-03-19 17:31
미시간대 유학생이 대부분이던 작은 학생교회를 섬기던 우리 부부의 신혼 아파트는 늘 학생들로 가득했다. 교회가 집이고 집이 교회였다. 한창 박사과정 공부 중이던 나와 정신과 레지던트 과정으로 바쁜 남편이었지만, 1주일에도 몇 번씩 우리 집은 학생들이 모이는 장소가 됐다. 그들은 우리에게 마치 한 가족과 다름없었다. 열심히 교회를 섬기면서 나는 또한 박사 논문을 쓰기 전에 통과해야 하는 시험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세 과목을 통과하고 나서 이제 마지막 한 과목을 남겨두고 있었다.
드디어 마지막 시험을 치른 후, 시험결과를 받아 열어 본 나는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편지에는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전혀 예상 밖이었다. 다시 한번 확인했으나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내 머릿속은 잠시 정지된 것 같았고 모든 것이 그저 깜깜할 뿐이었다. 어떻게 내 인생에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그동안 살면서 실패를 경험해 본 적이 없던 나는 낯선 미국 땅에서 처음으로 직면해야 하는 참혹한 현실 앞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심지어 곁에 있는 남편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도리어 공부하고 살림하고 교회 섬기느라 초를 다투어 가며 분주하게 살던 아내를 도와주지 않은 무정한 남편이라는 분노의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앞으로 내 인생은 어떻게 되지?’ 앞날의 인생에 대한 아무런 그림도 그려지지 않았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는 어떻게 이 소식을 알려야 하나.’ ‘공부를 안 하면 이제 무엇을 하며 살지.’ 다른 옵션들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나는 앞이 깜깜했다. 이전에 들었던, 미국 명문대에 다니던 한국 유학생들의 자살에 관한 기사가 떠올랐다. 그들도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런 절망을 느꼈을까. 정말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사리를 분별 못하는 철없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주님 안에서 나름대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박사과정을 마치지 못하고 학위를 받지 못한다는 한 가지 사실이 인생 전체를 마비시키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는 ‘죽음’의 생각들이 가득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존재도, 미래라는 시간도 머릿속에서 사라져 가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순간 내 인생에 놀라운 일을 행하시고 계셨다.
첫 아기의 임신소식! 내가 기쁨으로 고대하던 소식이 결코 아니었다. 내 인생 하나도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데 또 하나의 생명을 맡기시다니! 그러나 절망 가운데 죽음을 묵상하던 내게는 임신소식이 살아야 할 이유가 됐다. 아기를 위해서라도 살아야 했다. 1997년 1월 태어난 첫딸 지원이는 내 생명의 은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지원이는 답답한 마음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소중한 벗이었다. 쌔근쌔근 자고 있는 지원이에게 내 마음을 끝도 없이 이야기하곤 했다.
아침에 출근하며 남편은 아기와 함께 집에 있는 내게 일러주곤 했다. 아기가 엄마의 웃는 얼굴을 많이 보아야 정서적으로 건강해진다고…. 그런데 나는 지원이에게 웃는 얼굴 대신 침울하거나 무표정한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살아 있긴 했지만 삶의 의미를 몰랐던 것이다.
여자가 누릴 수 있는 특권 중 하나가 생명을 낳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의 계획이 무너지고 죽음과 같은 절망의 터널을 지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내게 생명을 낳게 하셨다. 그리고 내가 낳은 그 어린 생명은 이제 도리어 내 삶에 조금씩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다.
정리=최영경 기자 yk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