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남선 “3·1운동, 윤리운동으로 여기고 선언문 초안 작성, 참여 안해… 죄과 참회할 때 올 것”

입력 2013-03-18 20:38


1919년 3·1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도 33인의 한 사람으로 서명에 참여하지 않은 육당 최남선(1890∼1957·사진)이 자신의 입장을 변명한 인터뷰가 발굴 공개됐다.

육당은 1948년 3월 5일자 ‘평화일보’의 ‘피로 물든 선언문’ 제하의 3·1절 기념특집 인터뷰에서 “3·1운동을 민족윤리운동으로 체득하고 그 실천을 위하여 문안을 기초한 것인데 그 운동이 정치운동으로 내 의도와는 달리 진전됐다”며 서명 거절 이유를 말했다. 육당은 “문안은 내가 기초하였으나 이 운동에는 나의 주관대로 참가한 것이지 결코 그 운동으로 민족자결이 실현되리라고는 믿지 않았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육당은 ‘후회의 심경이 어떠냐’는 질문에 “나의 저지른 정도의 죄과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 인정 반성하며 참회도 할 때가 올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학병 권유와 관련, 그는 “만약 그날(해방)이 오게 되면 실권을 잡을 수 있도록 준비해야 되겠으니 젊은 청년 다수를 학병으로 보내 군사훈련을 시킬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전제로 학병을 찬성했다”며 “(학병 지원자가 적어) 총독에 대하여 면목이 없게 되었다”고 비교적 솔직하게 자신의 심정을 털어놨다.

육당은 인터뷰 이듬해 친일 반민족 행위로 기소돼 수감됐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한 뒤 1957년 사망했다. 이 자료는 김종욱 공연예술자료연구사가 발굴해 계간 ‘연인’ 2013년 봄호에 실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