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애슐리 박 (3) 서울대·미시간대·결혼… 이 모두엔 주님의 섭리가

입력 2013-03-18 17:36 수정 2013-03-18 21:52


딸이 여섯인 집안의 다섯째 딸로 태어난 나는 어렸을 때부터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다. 누구도 공부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좋아서 열심히 공부했다.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만큼 기어이 성취하고야마는 내게 식구들은 혀를 내두르며 ‘악발이’라는 별로 고상하지 않은 별명을 붙여 주었다.

노력의 결과인지 서울대 공대에 입학했다. 학과에서 유일한 여학생으로 보이지 않는 특혜를 누리며 대학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석사과정을 마치고 나면서 나는 더 큰 세상에 나가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하나님, 저는 미국에 가야겠어요. 공부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거예요. 미국에 갈 수 있게만 해 주시면, 그 어떤 것도 다 감당할게요.”

딸의 결정을 들으신 나이 많으신 부모님의 마음은 편치 않으셨다. 게다가 딸을 유학 보낼 정도로 부유한 형편이 아니었기에 두 분은 더더욱 걱정이셨다. 부모님의 걱정에도 아랑곳 않고 나는 비싼 학비는 무시한 채 유수한 명문대학 12곳을 골라 원서를 냈다. 어차피 내 능력으로 학비를 해결할 수 없었기에 오히려 담대해졌다. 봄이 되자 원서를 냈던 학교들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하는데 배달되는 편지마다 입학을 승낙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도 내 마음에는 왜 그리 확고한 믿음이 있던지! ‘나는 미국에 꼭 가게 될 거야.’ 10개 대학에서 온 편지를 열어보는 내내 내 믿음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열한 번째 편지가 미시간대에서 왔다. 입학을 허락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편지에는 외국인 학생들에게는 입학 이듬해부터 장학혜택을 줄 수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 당장 첫해 학비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걱정하시는 엄마에게 “엄마 아무 걱정하지 마,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거야!” 나는 국비장학생 시험을 보기로 했다. 서류전형, 필기시험 그리고 면접시험을 치르는데 내 실력이 어떻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반드시 합격시켜 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아니나 다를까 7월 말 국비장학생으로 합격됐다는 통고를 받았고 1992년 8월 11일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모든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 미시간대에 도착하자 나는 한국에서 하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공부에 몰두했다. 공부를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겠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에 ‘5년 안에 박사학위를 받으리라’는 각오로 학교와 교회만을 오가며 학업에 매진했다.

93년 겨울 예기치 않게 한 청년을 만났다.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드리겠다는 소원을 가진 의대 졸업반인 미국계 한국인 다니엘 박이라는 청년은 처음 대면한 자리에서 다짜고짜 청혼을 했다. 결혼? 전혀 관심이 없던 나였지만 성령의 강권함이 있었기에 나는 예스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 대답은 나의 삶에 예상치 않은 풍파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크리스천이 공부만 하면서 삽니까?” 평생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공부하러 온 유학생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당연하지….’ 어리둥절한 나에게 그는 크리스천은 사람들과 만나고 그들을 축복하며 살아야 마땅하다는 신앙강의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서로의 삶의 모습이 많이 다르긴 했지만 우리는 약속대로 94년 11월 결혼식을 올렸고 이제는 서로의 삶을 더 잘 알게 됐다. 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도와주고 축복하는 것에 익숙한 남편은 공부에만 혼신을 기울이는 아내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마침내 나의 변화를 위해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정리=최영경 기자 yk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