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태원준] 박근혜의 약속
입력 2013-03-17 17:54 수정 2013-03-17 18:06
어리둥절하다. ‘박근혜=약속’ 아니었나? 지난해 11월 27일 박근혜 후보는 대전역 첫 대선 유세에서 “국민과의 약속을 하늘같이 알고 지키겠다”고 역설했다. 꼭 두 달 만인 1월 27일 박근혜 당선인은 대통령직인수위원들에게 “내가 약속하면 여러분이 지켜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런 대통령의 약속이 취임 한 달도 안 돼, 그것도 정부의 틀을 갖추는 첫 인사부터 깨지고 말았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19일 경찰공약을 발표하며 “청장의 잦은 교체는 치안 공백으로 이어진다. 청장 임기를 반드시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지난 15일 외청장 인사에서 임기를 절반도 채우지 못한 김기용 경찰청장이 교체됐다. 경찰은 인사 전날까지도 김 청장이 유임될 줄 알았다고 한다. 대통령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해 12월 5일 광주와 목포 유세에서는 ‘대탕평 인사’를 약속했다. “국민대통합은 말로 외친다고 이뤄지지 않는다. 공공부처, 공공기관, 공기업을 막론하고 호남 인재들이 마음껏 능력을 펼 수 있게 하겠다.” 그러나 지금 마무리된 장·차관급 인사에선 호남을 찾아보기 어렵다. 서울과 영남이 절대 다수다. 새누리당 후보에게 대선 사상 가장 많은 표를 줬던 호남 사람들은 당황스러울 것이다.
박 대통령이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 이미지 덕에 당선됐다고 생각한다. 국민이 정치의 말 바꾸기에 번번이 뒤통수를 맞아온 한국에서 이것은 엄청난 자산이다. 야당 스스로 “질 수 없는 선거를 졌다”고 할 만큼 여당 후보에게 버거운 판에서 박 대통령은 ‘약속’을 통해 국민의 마음을 얻었다.
박 대통령의 14년 국회의원 경력 중 ‘약속 정치’의 클라이맥스는 2010년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행정 효율을 이유로 세종시 백지화에 나서자 그는 “국민과의 약속이므로 지켜야 한다”고 맞섰다. 여당 내 야당을 자임하며 국회 본회의 단상에 올라 반대 토론까지 했다. 세종시는 관철됐고 박 대통령은 ‘약속은 지킨다’는 이미지와 함께 충청의 마음을 얻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DJP 연합’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행정수도 공약으로 얻었던 캐스팅보트 충청을 박 대통령은 ‘약속’으로 일찌감치 확보했다. 약속의 힘은 대선에서 충청권 압승을 통해 입증됐다.
약속 덕에 당선된 대통령이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가 약속에 부여했던 무게만큼 속사정은 복잡할 게 분명하다. 권력의 내면은 맨얼굴을 드러내기 어려운 부분도 많다. 그렇더라도 이렇게 된 사정을 국민에게 설명해야 한다. 약속이 어긋났을 때 상대방에게 그 이유를 밝히고 양해를 구하는 건 최소한의 예의다.
윤창중 청와대 대변인의 설명은 안 하느니만 못했다. 지난 15일 외청장 인사로 호남 배제 논란이 일자 그는 “채동욱 검찰총장 후보자는 서울 출생이지만 전북 군산에 선산이 있다. 매년 선산에 다니는 그 지역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사회가 언제부터 선산을 기준으로 출신지를 따졌나. 눈 가리고 아웅 해서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신뢰를 쌓기는 어려워도 무너지는 건 순간이다. 인사에서 깨진 신뢰는 정책 공약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미 새 정부 국정목표에서 ‘경제민주화 실종 사건’을 경험한 터다. 지금 박 대통령이 맞닥뜨린 신뢰의 위기에 비하면 정부의 지각 출범 사태쯤은 사소한 문제일지 모른다. 신뢰의 끈을 유지하려면 박 대통령이 약속의 상대방인 국민들에게 직접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태원준 정치부 차장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