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그리트’ 오랜 꿈, 현실이 되다… 동양인 최초 4월 ‘마그리트와 아르망’ 무대 서는 김주원
입력 2013-03-17 17:15
발레리나 김주원(35)이 2000년 갈라 공연 연습을 위해 한 달 정도 영국 런던에 머물 때다. 어느 날 프랑스 무용수 실비 길렘과 니콜라 르리쉬가 나오는 발레 ‘마그리트와 아르망’를 보러갔다. 충격이었다. 공연이 끝난 후 객석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였다. 음악도, 무용수의 움직임도 기억나지 않았다. 눈물만 주르륵 흘러내렸다. 35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주인공 ‘마그리트’의 정취에 온몸이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그때 마음먹었다. 언젠가는 이 작품을 해보리라.
그의 꿈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4월 5∼7일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세계적인 안무가 프레데릭 애쉬튼(1904∼1988)의 ‘마그리트와 아르망’을 공연하게 된 것이다. 동양인 최초이자, 지난해 6월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라는 타이틀을 벗은 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서는 첫 무대다. 지난 13일 그가 연습 중인 서울 미아동 서울사이버대학교에서 김주원을 만났다.
“감히 제가 하리라곤 생각 못했어요. 그런데 10여 년 동안 이 작품이 머리 속에서 맴돌았지요. 결국 시도해보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용기가 필요했다. ‘전설적인 작품’이기 때문이다. ‘마그리트와 아르망’은 영국 로열발레단의 예술감독을 지낸 애쉬튼이 20세기 최고 무용수 커플인 마고트 폰테인과 루돌프 누레예프에게 헌정해 1963년 초연한 작품. 당시 큰 박수를 받았지만 폰테인이 사망하면서 20년 동안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그 후 다시 공연된 것이 김주원이 봤던 실비 길렘이 나오는 작품이었다. 프란츠 리스트의 피아노 소나타 B단조 선율 속에 마그리트와 아르망의 슬픈 사랑이 펼쳐진다.
김주원은 지난해 저작권을 가진 영국 측에 자신의 프로필과 동영상 등을 보냈다. “영국에 직접 가서 오디션을 봐볼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다행히 흔쾌히 허락을 받았죠. 제가 폰테인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하더라고요.”
국내 정상급 기량의 발레리나 김주원도 막상 연습해보니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동작을 약간 쉽게 바꿀 수도 있지만 원작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에요. 주변에서 이런 저런 의미를 부여해주니 정신적 스트레스도 대단하고요.”
파트너는 미국 워싱턴발레단의 수석무용수 김현웅(32). “현웅이는 제 춤 인생에서 가장 오랜 시간 파트너를 한 친구예요. 저를 누나가 아니라 형이라고 부를 정도로 스스럼없는 사이죠. 이번에 보니 표현이 더 깊어지고 풍부해졌네요.”
프리 선언을 한 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항상 주어진 것만 하다가 직접 선택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이 가장 큰 변화다. “국립발레단에선 한 번에 네다섯 작품을 동시에 연습하는 것이 보통이고, 1년에 150회 무대를 서야 했지요. 이젠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다작보다는 깊이 있고 진심을 담은 춤을 추고 싶어요.”
서울사이버대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도 공부하고 있다. 10여 년 전 결손가정 아이들에게 발레를 가르쳤던 게 계기가 됐다. 처음에는 불신이 가득 찬 아이들의 눈빛이 같이 연습하고 나니 그 나이대의 눈빛으로 돌아왔다는 것. 유니세프 홍보대사로도 활동 중이다. 그가 후원하는 아이들이 50여명이다.
발레리나로는 적지 않은 나이다. “미래를 고민하기보다는 현재에 충실하면서 최선을 다하려고요. 다른 거 뭐할까 신경 쓰면 발레에 100% 집중할 수 없거든요.” 그는 스스로 더 이상 최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 미련 없이 무대에서 내려올 것이라고 말했다.
한승주 기자 sj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