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승용차] 힘과 품위 유지… ‘세단이 대세’
입력 2013-03-15 18:33
고위공직자 소유차량 전수 분석
공직자윤리법은 국가의 녹을 먹는 사람들이 자신의 재산을 등록하고 공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윤리법 4조 2항 카 항목은 부동산에 버금가는 재산신고 목록으로 자동차, 건설기계, 선박 및 항공기를 지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아직 서구처럼 요트나 자가 비행기를 가진 공직자가 등장하지는 않았다. 공직자 재산신고 부동의 1위인 2조원대 자산가 정몽준 새누리당 최고위원조차 자신 명의의 차량은 2011년식 제네시스 3.8 한 대뿐이다. 물론 배우자가 많은 차량을 가지고 있긴 하다. 2012년 3월 국회 공보 등록 기준으로 정 의원의 부인은 제네시스, 그랜저, K5 하이브리드, 베라크루즈(2007년식과 2010년식) 등 총 5대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다.
최고 권력자들이 모두 정 의원처럼 부자는 아니지만 힘에 어울리는 품위를 차에 투영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의 차는 국내 최고급 세단인 에쿠스와 국내 최대형 스포츠유틸리티 차량(SUV)인 베라크루즈다. 박 대통령의 원로그룹 7인회 멤버이자 3부 요인 가운데 한 명인 강창희 국회의장은 2008년식 현대차 그랜저를 배우자와 한 대씩 소유하고 있다. 강 의장의 그랜저가 배기량 3342㏄로 부인의 2656㏄보다 힘도 좋고 덩치도 큰 모델이다.
양승태 대법원장의 차는 2005년식 기아차 스포티지다. 양 대법원장은 등산 마니아로 유명하다. 2011년 이명박 대통령이 대법원장 임명 의사를 타진하기 위해 전화 통화를 시도할 때도 그는 평소 꿈꾸던 북아메리카 로키산맥을 종주하던 중이었다. 양 대법원장은 휴일이면 오프로드에 강점을 보이는 준중형 SUV 스포티지를 직접 몰고 산을 타곤 한다. 그의 부인 차는 2009년식 기아차 모닝이다. 국민일보가 분석한 고위 공직자 가운데 1000㏄ 이하 경차를 소유한 케이스는 양 대법원장 부부가 유일했다.
친박 핵심들이 집결한 청와대에서도 에쿠스가 눈에 띈다. 허태열 대통령 비서실장은 지난해 3월 18대 국회의원직을 마무리할 무렵의 재산 등록에서 2010년형 에쿠스 3.8 모델을 신고했다. 박 대통령이 가진 에쿠스 최고급형보다는 한 단계 낮지만 8600만원이 넘는 차량이다. 허 실장은 당시 2005년식 그랜저 2.7 모델도 소유하고 있었다.
청와대 인사들은 국회 인사청문회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이 새롭게 재산신고를 하기 전까지는 예전 관보를 통해서만 소유 차량을 확인할 수 있다. 국가가 발행하는 관보는 공문서로서의 효력을 가진 팩트의 보고다.
허 실장과 함께 18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이정현 정무수석은 당시 후원회를 통해 정치자금을 모은 뒤 2011년식 기아차 오피러스 3.3 모델을 구입했다. 오피러스는 K9이 등장하기 전까지 기아차의 플래그십 세단이었다. 플래그십은 자동차 메이커가 자존심을 걸고 첨단 기술을 총동원해 만들어내는 대표작을 말한다. 이 수석은 오피러스를 사면서 원래 있던 1991년식 그랜저 XG를 500만원에 팔아 처분했다.
새 정부 들어 청와대에 신설된 국가안보실의 김장수 실장은 1993년식 기아차 콩코드를 지난해까지 몰았다. 평생 군인으로 복무한 장수답게 2000㏄급 콤팩트 세단을 끈기 있게 탔다. 김 실장은 의원이던 지난해 3월 이 차를 매각하고 준중형인 2007년식 기아차 프라이드를 새로 구입했다고 신고했다. 중고차인 프라이드의 매입 가격은 664만원이다. 박근혜 정부에서 역시 장관급으로 격상된 경호실의 박흥렬 실장은 2008년 3월 육군참모총장인 대장 신분으로 행한 마지막 재산등록 때 1997년식 쏘나타Ⅱ를 보유하고 있었다.
조원동 경제수석은 이명박 정부 국무총리실 사무차장이던 2010년 4월 기아차 옵티마를 가지고 있다고 신고했다. 부인은 조 수석보다 더 고급인 2004년식 쏘나타 2.7을 몰고 있었다. 곽상도 민정수석도 변호사로 나가기 직전인 2008년 3월 대구지검 서부지청장일 때 EF쏘나타를 탔었다. 모철민 교육문화수석은 2010년 국립중앙도서관장 시절 2004년식 기아차 중형 SUV 쏘렌토 2.5 모델을 가지고 있었다.
한평생 관료로 있던 사람들은 본인보다 배우자의 차가 멋진 경우가 많다. 검찰 출신 정홍원 국무총리도 그렇다. 정 총리는 1995년 11월 울산지검장일 때 1991년식 쏘나타 오토매틱 2.0 모델을 처음 구입했다. 당시 관보상 등록 가격은 1200만원이다. 정 총리는 이 차를 3년 정도 보유하다 1998년 4월 서울 남부지검장일 때 150만원에 매도했다. 그 이후로는 차를 소유한 경력이 없다. 대신 부인 최옥자씨는 1994년식 아벨라, 1996년식 아반떼, 2002년식 SM520V, 2009년식 그랜저로 차를 업그레이드해 왔다. 최씨가 선택한 아반떼와 SM5 그랜저 등은 모두 해당 연도에 10만대 이상 팔린 한국의 대표 베스트 셀링 모델들이다.
권력의 정상에서 내려온 역대 대통령들의 차도 흥미롭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아직 퇴임 후 재산변동 내역이 공개되지 않고 있는데, 지난해 3월 기준으로는 2008년식 카니발 리무진을 가지고 있었다. 카니발 리무진은 기아차가 원래 11인승이던 차를 9인승으로 줄여 보다 넓은 실내공간을 누리도록 만든 차다. 이 전 대통령이 2007년 말 대선에서 그랜드 카니발을 타고 전국을 누볐을 때 느낀 편리함에 매혹돼 선택했다는 후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부산에 공장을 둔 르노삼성의 SM520을 10년 넘게 소장했는데, 2008년 퇴임 직후엔 현대차 에쿠스 최고급형을 추가로 구입했었다.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 정착한 노 전 대통령은 1년 남짓 이 차를 타고 전국의 잘사는 농촌을 보러 돌아다녔으나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하고 서거했다.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