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전정희] ‘레디메이드 이순신’
입력 2013-03-15 19:02
KBS 2TV 주말드라마 ‘최고다 이순신’의 주인공 이순신(아이유 분)은 청년 백수다. 그저 그런 대학을 나와 토익 610점에 운전면허증 소유가 스펙의 전부인 우리 시대의 평범한 청춘이다. 아들을 바랐던 할머니의 뜻에 따라 명장 ‘이순신’을 감히 차용했다. 어느 날 순신은 입사 면접에서 질문조차 받지 못한다. “왜 내게는 질문을 않느냐”고 따지자 “(이름이 그러니) 해경이나 지원해 독도나 지켜라”고 놀림만 당한다.
1934년 발표된 채만식 소설 ‘레디메이드 인생’의 주인공 P씨. 당대 대학까지 나온 인텔리임에도 불구하고 취직을 못하고 떠돈다. 잘 아는 신문사 사장을 찾아가 구직을 부탁하나 “훌륭한 인테리 청년들이 일이 없어 큰일이야. 대체 왜 월급생활만 하려 하나? 농촌으로 내려가 계몽운동이라도 해야지”하며 속 지르는 얘기에 부아가 난다. 대거리를 해보지만 그것뿐이다.
봄볕 슬슬 오르는 초봄. 구직에 실패한 두 사람은 서울 광화문 앞 사거리를 어깨 축 처져 걷는다. 전차와 차들이 바삐 지나고, ‘멋진 인생’들이 재잘대며 그들 곁을 스쳐 지난다. 하늘도 맑다
순신은 사거리 횡단보도를 건너다 중앙의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 선다. 그리고 장군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내 불합격을 가족에게 알리지 말라”하며 장군의 명언을 패러디한다. 그 지점에서 인생이 어디로 갈지 몰라 길을 잃는 순신이다.
P 역시 광화문 사거리에서 길을 잃는다. 훗날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세워지는 도로 한복판을 지나 비각 앞에 발길을 멈춘다. 식민치하를 만든 고종임금 보위 40년을 기념하는 비각…. ‘전차가 내는 종소리 요란하고, 말쑥말쑥 차려 입은 젊은이들이 봄볕처럼 오간다’고 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각기 ‘88만원 세대’와 ‘룸펜인텔리겐치아’이다. 사거리에서 청와대와 조선총독부 쪽을 바라보고 걷던 두 사람. 순신은 왼쪽 길을 택해 부암동, P는 오른쪽 길을 통해 삼청동 산꼭대기 집으로 간다.
순신과 P의 세월의 간격은 80년이다. 구직에 ‘실패해도 굶어죽지 않는다’와 ‘실패하면 굶어죽는다’가 차이일 뿐이다. 두 인물의 광화문 ‘신’은 당대가 안고 있는 고민의 본질을 건드리는 양 상징적이다. P는 “그놈의 졸업장만 아니면 차라리 노동자가 될 것 아닌가. 허울만 좋은 지식공장에서 찍어낸 기성품 인생… 레디메이드 인생이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자조하고, 순신은 “엄마 아빠에게 내세울 게 없는 딸이어서 미안해.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어”하며 취직 못한 자신의 무능을 탓한다.
이들의 문제를 풀 작품의 키워드는 어딜까? 청와대와 조선총독부일 것 같다. 그러나 P는 식민지 교육의 희생양일 뿐 조선총독부가 챙겨야 할 대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순신은 잘못된 교육정책의 결과로 ‘레디메이드된’ 해방된 조국의 ‘88만원 세대’이다. ‘잉여인간’이 되어 비실거리는 좀비처럼 떠도는 것이 그들만의 책임은 아니다. 하릴없어 미디어가 만들어낸 허상을 좇아 연예인이나 되려고 허우적댈 뿐이다. ‘최고다 이순신’이 1∼2회 방영에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이유다.
순신류(類)는 지금 박근혜 정부를 바라보고 있다. 대출받은 대학 등록금을 갚아야 할 시점이어서 휴대전화만 울리면 “네, 대출이요?”하고 깜짝 놀라는 세대다. 한데 새 정부는 정보통신기술(ICT) 업무를 담은 정부조직법을 처리 못해 하세월이다. ICT에 청년 일자리가 있는데도 말이다. P가 생각할 때 해방된 대한민국, 참 답답할 노릇이라고 혀를 차겠다. ‘레디메이드 인생’이니 알아서 하란 얘긴 아닐진대 말이다.
전정희 문화생활부 선임기자 jhjeon@kmib.co.kr